[뉴스스페이스=김희선 기자] 2027년 2월 18일, 유럽연합(EU) 스마트폰 시장의 설계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이 날 이후 EU 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신형 스마트폰·태블릿 등 휴대용 전자기기는 소비자가 ‘스스로’ 배터리를 분리·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
SamMobile, 그릭뉴스등에 따르면, 이번 조치는 10여 년간 이어져 온 밀봉형 일체형 배터리 구조에 제동을 거는 규제이자, 수리 용이성과 전자폐기물 감축을 앞세운 ‘순환경제 정책’의 상징적 조치다.
규제의 골자…“열·용제·전용 공구 없이 분리 가능해야”
이번 조치는 2023년 발효된 EU 배터리 규정(Regulation 2023/1542)의 핵심 조항으로, 특히 내장형 휴대용 배터리를 대상으로 한 제11조가 스마트폰 업계를 직접 겨냥한다. 규정에 따르면 배터리가 ‘쉽게 탈착 가능(readily removable)’하다고 인정받으려면 소비자가 상용 공구만으로, 열이나 화학 용제, 별도 유료 전용 공구 없이 배터리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제조사가 특수 공구를 기기와 함께 무상 제공할 경우 예외를 인정하는 등 일정 수준의 설계 자유는 남겨뒀다.
공급 의무도 강화됐다. 각 스마트폰·태블릿 모델에 대한 교체용 배터리는 해당 모델의 마지막 판매분이 시장에 나온 시점을 기준으로 최소 5년간 제공해야 하며, 가격 역시 “합리적이고 차별 없는 조건”으로 공급하도록 명시했다. 이는 배터리 노후화로 인한 조기 폐기를 줄이고, 수리·업그레이드 시장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EU는 이 규정을 포함한 배터리법 패키지를 통해 2030년까지 소비자 비용 200억 유로 절감, 전력 소비 2.2TWh 감축이라는 목표치를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매년 EU에서 판매되는 약 1억5,000만대의 스마트폰과 2,400만대의 태블릿이 야기하는 연 500만톤 안팎의 전자폐기물 문제를 완화하는 것이 궁극적 정책 목표다.
제조사에 미치는 파장… ‘탈착식 후면’ 복귀보다 설계 미세 조정 가능성
업계 영향은 예상만큼 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최근 갤럭시 시리즈에서 강한 접착제 대신 ‘당김 탭(pull-tab)’ 구조의 배터리 파우치를 도입해, 후면 커버 완전 분리형으로 회귀하지 않고도 규정을 상당 부분 충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두었다.
해외 IT 매체 SamMobile 등은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수리 용이성의 점진적 개선”을 꼽는다. 즉, 과도한 접착제 사용 축소, 배터리 모듈과 커넥터 접근성 개선, 공식 분해·교체 매뉴얼 공개, 소비자가 접근 가능한 표준 공구 체계 확립 등을 통해 사용자·자영업 수리업자 모두에게 문턱을 낮추는 쪽으로 설계가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현실적으로 제조사들은 방수·방진(IP 등급) 유지, 초박형·경량 설계, 구조 강성 확보라는 기존 설계 제약 위에 ‘사용자 교체 가능’ 요건까지 얹어야 한다. 특히 IP67 이상의 생활 방수, 1,000회 충전 사이클 후 80% 용량 유지 같은 고성능 배터리·내구성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후면 분해 난이도를 낮추려면 내부 구조 개편과 부품 재배치가 불가피하다. 애플·삼성·구글 등 글로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모바일 라인업의 유럽향 설계 분기 여부, 글로벌 공통 플랫폼 유지 여부를 두고 치열한 비용·브랜드 전략 계산이 불가피하다.
에코디자인 규정과의 ‘중첩’… 애플에 열어준 회피 루트?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태블릿을 겨냥한 별도의 친환경 설계 규정(Ecodesign Regulation)이다. Right to Repair Europe이 인용한 유럽위원회 지침에 따르면, 특정 성능 기준을 만족하는 스마트폰·태블릿에 대해서는 에코디자인 규정이 배터리 규정보다 우선 적용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IP67 수준의 방수·방진 등급을 유지하면서도 1,000회 충전 후 배터리 용량 80% 이상을 보장하는 기기의 경우, ‘일반 소비자 직접 교체’ 요건에서 사실상 예외를 인정받을 여지가 열려 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이 경우 제조사는 소비자가 아닌 ‘전문 수리업체’ 또는 공인 서비스센터가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부품·매뉴얼을 개방하는 선에서 의무를 충족하고, 완전한 사용자 탈착형 구조는 피할 수 있게 된다. 업계·시민단체에서는 이를 ‘아이폰식 설계’를 유지하려는 애플 등 프리미엄 제조사에게 사실상 회피 루트를 제공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Right to Repair Europe은 이 예외 조항이 남용될 경우 “규정의 핵심 목표를 훼손하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며, 향후 집행위 가이드라인 적용 과정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겠다고 경고했다.
‘배터리 여권’과 재활용 의무… 비용·데이터·책임 모두 커진다
사용자 교체 의무는 EU 배터리법 전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 규정은 배터리 외형·라벨링뿐 아니라, 생산–사용–폐기 전 과정에서의 탄소 발자국 측정, 원자재 회수율, 최소 재활용 원료 사용 비율까지 포괄하는 전 생애주기 규제를 담고 있다.
모든 유형의 배터리에 대해 수명주기별 탄소 배출량 측정·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코발트·니켈·구리·리튬 등 핵심 소재에 대해 2027년 기준 최대 90% 회수(리튬 50%), 2030년에는 95% 및 80%까지 상향된 회수율 목표를 제시한다.
또한 일정 용량 이상 배터리에는 QR 코드 기반의 ‘디지털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 도입을 의무화해 제조사, 생산지, 탄소발자국, 재활용 성분 비율, 적합성 평가 정보를 통합 관리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향후 공급망과 애프터서비스(S·A/S) 전략을 설계할 때, 부품 단위까지 탄소·재활용 데이터를 추적·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휴대용 배터리 수거·재활용 의무도 강화된다. EU는 2031년까지 휴대용 배터리 61% 수거 목표를 제시했고,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통해 배터리 제조사·완성품 업체가 폐배터리 회수·재활용 의무를 직접 부담하도록 했다. 스마트폰 업체 입장에서는 단순히 “배터리만 교체 가능하게” 만들 문제가 아니라, 판매 이후 수년간 교체품 공급, 회수·재활용 체계, 데이터 보고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규제 대응 비용을 감안해야 한다.
스마트폰 산업의 전략적 변수…수리권·표준화·글로벌 파급
EU의 이번 조치는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 논쟁과 맞물려 글로벌 스마트폰 산업 구조에 중장기적 변수를 던지고 있다. 하나는 사용자·독립 수리업체의 접근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애프터서비스 시장의 경쟁을 촉진하고, 제조사 중심의 폐쇄적 수리 모델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배터리 모듈, 커넥터, 방열 구조 등 하드웨어 수준에서 일정 부분 표준화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2027년 ‘사용자 교체형 배터리’ 의무화는 단순한 구조 변경을 넘어, 스마트폰의 기획–설계–판매–수리–폐기까지 라이프사이클 전반을 재설계하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제조사와 부품업체 입장에서도 이 규제를 단순 준수 대상이 아니라, 수리성과 친환경성을 앞세운 신규 가치 제안의 기회로 볼 수 있을지,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