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조일섭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4분기 영업이익 20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에도 임원들에게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라며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못 박았다.
단순 위기 의식 고취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AI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삼성의 ‘체질개조 데드라인’을 사실상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20조 영업이익의 이면
삼성전자는 2025년 4분기 잠정 실적에서 매출 93조원, 영업이익 20조원을 기록하며 한국 기업 최초로 분기 영업이익 20조원 시대를 열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약 22.7%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00%를 훌쩍 넘는 208% 안팎의 급증세를 보였다. 이는 2018년 3분기 17조5700억원 수준이었던 이전 최고 실적을 약 7년 만에 뛰어넘은 수치로, 한국 기업 분기 실적 역사도 다시 썼다. 증권사 컨센서스였던 매출 약 90조6000억원, 영업이익 19조원대 전망을 상회한 ‘어닝 서프라이즈’라는 평가가 국내외에서 동시에 나왔다.
호실적의 주된 배경은 글로벌 AI 투자 확대로 인한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 재개다. DRAM과 낸드플래시 가격은 2025년 하반기부터 분기 기준 30~40%대 급등세를 보였고,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영업이익은 분기 16~17조원 수준까지 회복한 것으로 국내외 애널리스트들은 추정하고 있다.
WSTS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2026년 25% 이상 성장해 약 9750억달러, 메모리만 30% 성장해 4400억달러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현 시점의 실적 개선은 AI 인프라 투자 랠리와 맞물린 구조적 흐름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샌드위치 위기론’ 재소환의 속내
그럼에도 이 회장이 임원 교육에서 “마지막 기회”라는 표현까지 동원한 것은, 고(故) 이건희 회장이 2007년 제기한 ‘샌드위치 위기론’을 현실화된 구조적 리스크로 재규정한 것과 맞닿아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는 샌드위치 신세”라고 경고했는데, 이번 영상 교육에서는 “우리나라는 지금도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달라진 건 경쟁 구도가 바뀌었고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는 메시지가 새롭게 강조됐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지형에서 삼성전자는 메모리에서는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초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치열한 추격·추월 경쟁을 벌이고 있고, 시스템·파운드리 분야에서는 TSMC와 미국 빅테크 중심의 생태계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여기에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의 대중국 장비·칩 수출 규제, 공급망 재편 압박이 겹치며, 한국 기업은 중국 시장 의존도와 미국 동맹 요구 사이에서 전략·비용 부담이 동시에 커지는 ‘지정학적 샌드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삼성다움 복원’과 임원 재교육
이번 메시지가 전달된 무대는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이라는 이름의 전 계열사 임원 세미나다. 삼성은 지난주부터 삼성전자를 포함한 전 계열사의 부사장 이하 임원 2000여명을 대상으로 2016년 이후 9년 만에 그룹 차원의 임원 교육을 재가동했다. 교육은 삼성인력개발원이 주관하며, 2009~2016년 매년 이어졌던 임원 특별 세미나의 사실상 부활판으로 평가된다.
세미나 현장에서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고, 임원들에게는 ‘위기를 넘어 재도약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크리스털 패가 수여됐다. 이는 지난해 그룹 내부 키워드였던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는 표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위기를 ‘상수’로 전제한 상태에서 재도약을 위한 체질개선을 집단 미션으로 부여한 상징적 조치로 읽힌다.
재계에선 이 같은 일련의 연출을 두고, 실적 반등 구간에 오히려 위기의식을 극대화하는 ‘역(逆)사이클 리더십’의 전형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AI·인재·문화혁신…이재용이 찍은 세 축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제시한 과제로 ▲인공지능(AI) 중심 경영 ▲우수 인재 확보 ▲기업문화 혁신 등 세 가지 축을 콕 집어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삼성전자가 2025~2026년 그룹 경영 키워드로 ‘AI 혁신(AX, AI Transformation)’을 내세우고, DS(반도체)·DX(세트)를 막론한 전사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기조와 맞닿아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사내 공정·설계·품질에 AI를 적용하는 ‘AI형 반도체 개발·양산 체계’ 구축을 공식화했고, DS부문 경영진은 “논리·메모리·파운드리·첨단 패키징을 아우르는 원스톱 솔루션으로 AI 시대 표준을 선도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인재 전략 측면에서는 글로벌 빅테크·반도체 업체들이 HBM, AI GPU, 맞춤형 ASIC 인재를 두고 ‘연봉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삼성 역시 미국·유럽·동아시아 R&D 거점을 축으로 고급 인력을 선점하지 못하면 기술 리더십을 되찾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기업문화 혁신은 수직적·보수적 조직문화로는 초격차 기술과 초고속 실행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내부 반성의 연장선이다. 2025년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등에서도 삼성은 ‘민첩한 조직문화·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강화를 경영 화두로 제시하며, AI 도입과 맞물린 업무 방식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글로벌 슈퍼사이클과 ‘데드라인’ 인식
시장 환경만 놓고 보면 삼성에 유리한 숫자들은 더 있다. WSTS는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1조달러에 근접할 것으로 보고 있고, BofA·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IB들은 2026년 HBM 시장 규모를 540억달러 이상, DRAM·NAND 매출은 전년 대비 각각 50%·40%대 성장 구간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한다. 일부 전망에선 2028년 HBM 시장 규모가 2024년 전체 DRAM 시장을 넘어설 것이라는 분석도 제시하고 있어, AI 메모리를 둘러싼 판도 변화가 기존 메모리 사이클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제는 이 ‘황금 구간’이 삼성에게 자동으로 초격차 복귀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이미 HBM3E·HBM4 양산 체제를 앞세워 글로벌 AI 메모리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했고, 미국·대만·중국 업체들도 AI 서버용 메모리·패키징 주도권 경쟁에 본격 가세했다.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에서는 TSMC가 3나노 이하 공정에서 여전히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미국 빅테크는 자사 AI 가속기용 맞춤형 칩 생태계를 강화하면서 공급망 주도권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이재용 회장의 “마지막 기회” 발언은, AI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되는 2025~2027년을 전후로 기술·인력·조직에서 ‘질서 재편의 승자’가 사실상 고정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에 가깝다. 일각에선 이번 임원 교육과 메시지를, 삼성 내부적으로는 메모리 초격차 재확보와 시스템·파운드리 반등, 조직문화 혁신을 동시에 관철해야 하는 ‘3년짜리 체질개조 프로젝트’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