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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시대] “세계를 거꾸로 뒤집은 거장, 세상 떠나다”…獨 네오‑표현주의 거두 게오르크 바젤리츠 88세로 별세

 

[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독일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본명 한스‑게오르크 케른)가 4월 30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피사체를 거꾸로 그리는 파격적인 작업 방식으로 전후 유럽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로이터, AFP, DPA, michaelwerner에 따르면, 4월 30일(현지시간) 그의 오랜 파트너인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갤러리는 “한 세대의 독일 시각 예술을 형성한 작가가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와 한국 경제·문화 매체들도 일제히 그의 타계를 긴급 타전하며, ‘거꾸로 그린 그림’으로 전후 유럽 미술을 뒤흔든 문제적 거장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1938년 1월 23일 작센주 드레스덴 인근 소도시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폐허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였다. “무너진 질서와 붕괴된 사회 속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회고처럼, 어린 시절 체험한 폭격과 잿더미는 평생 작업의 심층 배경이 됐다. 동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육을 받던 그는 ‘형식주의’라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서베를린으로 탈출해 서독 미술계에 편입했고, 이 과정에서 고향 이름을 딴 ‘바젤리츠’라는 새 이름을 예명으로 채택했다.

 

그의 이름을 국제무대에 각인시킨 첫 장면은 1963년 베를린 첫 개인전이었다. 당시 전시된 문제작 ‘양동이 속 거대한 밤(Die große Nacht im Eimer)’은 뒤틀린 남성 누드를 노골적으로 묘사해 “외설” 논란을 일으켰고, 경찰 압수와 전시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전후 독일 사회가 덮어두고 싶어하던 폭력·성·범죄의 무의식을 정면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전후 독일 미술사에서 검열과 표현의 자유가 정면 충돌한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후 그는 독일군 패잔병을 연상시키는 찢긴 군복과 초라한 자세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영웅(Helden)’ 연작을 통해, 승전국 서사의 이면에 가려진 패전국 독일의 정체성 붕괴와 도덕적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젤리츠가 현대미술사에 각인시킨 가장 결정적인 전략은 1969년 시작된 ‘전도(顚倒) 회화’, 즉 피사체를 통째로 거꾸로 그리는 방식이다. ‘거꾸로 된 숲(Der Wald auf dem Kopf)’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작업부터 그는 인물, 풍경, 독수리, 사슴, 레닌과 같은 역사적 인물까지 화면 전체를 상하 반전해 배치했다.

 

그는 이 전도 기법을 통해 이미지에 붙은 이야기와 상식적 의미를 걷어내고, 관람자의 시선을 형·색·질감이라는 회화의 본질적 요소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미국 비평지 「브루클린 레일」은 “그의 전도는 관람자의 반응에 추상적 요소를 주입해 작품을 더 웅변적이고 더 독창적으로 만든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의 초창기 전도 작품 6점은 훗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컬렉션으로 편입되며, ‘거꾸로 그린 그림’이 실험을 넘어 제도권 미술의 정전(canon)으로 자리 잡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의 회화와 조각은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한 신표현주의의 핵심 언어를 제공했다는 것이 국내외 평단의 공통된 평가다. 안젤름 키퍼,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함께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전후 세대 작가로 분류되며, 격정적인 붓질과 두터운 물감, 왜곡된 인체를 통해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강력한 회화적 어휘를 구축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판화 작업에 뛰어든 그는 1978년 카를스루에 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며 제도권 교육 현장에서도 영향력을 넓혔다. 1980년에는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 전시를 통해 대형 조각을 선보이며,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다매체 작가로 포지셔닝했다. 2019년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개관 이래 처음으로 생존 작가 개인전을 허용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바젤리츠였다는 사실은 그가 유럽 미술계에서 차지한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성과 제도권 인정 면에서도 그는 생전 이미 ‘살아있는 거장’의 지위를 굳혔다. 2025년 프리즈 서울 개막 직후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부스에서 그의 회화 「Es ist dunkel, es ist」(2019)이 180만 유로, 당시 환율 기준 약 29억원에 판매돼 해당 페어 최고가 거래를 기록했다.

 

 

국내 경매 시장에서도 케이옥션 2024년 10월 경매에 추정가 7억~15억원으로 책정된 대형 회화가 출품되는 등 블루칩 작가로서의 몸값을 입증했다. 한국 주요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꾸준히 매입하면서, 한국은 독일·미국·일본과 더불어 그의 주요 판매·전시 시장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년기에도 그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70대 이후 그는 쇠약해지는 자신의 신체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연작에 천착했고, 최근에는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시키는 ‘아비뇽’ 연작에서 늙어가는 육체를 거꾸로 그려 넣으며 죽음, 유산, 예술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는 목조각과 대형 회화를 아우르는 전시로 ‘살아있는 전설’ 대접을 받았고, 202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와 연계된 대형 신작전 「Eroi d’Oro(황금의 영웅들)」가 5월 6일 베네치아 폰다치오네 조르조 치니에서 개막할 예정이었다.

 

런던 화이트 큐브 버몬지는 6월 대규모 신작 회화전을 예고했지만,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전시 성격은 자연스럽게 회고전·추모전 형식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2024년 타데우스 로팍 서울 전시와 세화미술관 등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세상을 거꾸로 본 노(老)화가의 시선”을 직접 확인하려는 관람객이 이어졌다.

 

바젤리츠는 생전에 “나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곧게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독일을 상징하는 독수리, 사슴, 사회주의 리얼리즘 도상, 레닌의 초상까지 모조리 뒤집어 그린 행위는, 승패·이념·국가를 가르는 기성 권위를 화면에서 해체하는 라디컬한 제스처였다.

 

오랜 세월 논란과 검열, 정치적 오해를 감수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전도 법칙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거꾸로 그린 그림’은 단일한 기법을 넘어 “전후 유럽 미술의 윤리와 미학을 동시에 뒤집어 놓은 상징적 언어”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 세계 주요 미술관과 시장,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전시 현장에서 계속해서 거꾸로 매달릴 그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당연하다고 믿는 세계는 정말 똑바로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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