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스페이스=김혜주 기자] 서울시가 저출산 극복의 일환으로 도입한 ‘미리내집(장기전세주택2)’ 정책이 정작 무주택 실수요자가 아닌, 현금부자 신혼부부만을 위한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8월 현재까지 5차례에 걸쳐 입주자를 모집한 ‘미리내집’은 2025년 8월 모집에서 평균 경쟁률 39.7대1을 기록했지만, 이는 지난 4월 64.3대1에 비해 3분의2 가까이 급락한 수치다. 특히 지난 5월에는 일부 단지가 759대1이라는 극단적인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모집에서는 강남구 청담르엘 49㎡가 보증금 7억7298만원, 송파구 잠실래미안아이파크 59㎡가 7억4958만원 등 6억원 이상 고가 물량이 속출하면서 관심을 보이던 실수요자의 발길이 뚝 끊겼다.
문제는 ‘실수요자’였던 4050세대 다자녀 무주택자와 같은 계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산 형성 기간이 짧은 신혼부부에게만 집중된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책 취지와 달리 자금력이 부족한 무주택 신혼부부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6·27 대출규제로 정책대출(버팀목 전세대출) 한도가 3억원에서 2억5000만원(신혼부부 기준)으로 줄였고, 전세보증금이 4억원을 넘으면 대출 자체가 불가해 아예 ‘현금부자’만 지원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번 모집 물량 중 대출이 가능한 주택은 동작구 힐스테이트 장승배기역 44㎡(보증금 3억3228만원) 51가구뿐으로, 전체의 10% 남짓에 불과하다. 실제로 올 4월 4차 물량에서 정책 대출만으로 전세금을 충당할 수 있는 세대는 겨우 1.6%로 파악됐다. 즉, 거의 모든 신혼부부가 거액의 현금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제도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출산 인센티브”와 “장기거주·우선매수 청구권” 등 각종 혜택을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신용과 현금력이 부족한 계층은 입주 문턱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국토교통부에 수도권 전세대출 한도 상향(4억→6억원)을 요청했으나 정부가 가계부채 관리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면서, 서울시의 정책 목표와 중앙정부의 금융정책도 완전히 엇박자를 내는 모습이다.
국제적 시각에서 봐도 한국식 장기전세주택은 계층별 지원이 불균형하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여러 유럽국가의 경우 대상 계층의 다양성, 임대료 상한제, 주택형별 맞춤화 등 다층적 설계가 기본이다. 그러나 국내 장기전세는 ‘신혼부부’라는 단일계층에 특혜가 집중되어 있고 보증금 기준, 소득 기준 장치가 사실상 정책수혜의 적정성을 흔들고 있다.
특이하게도 4050 다자녀 무주택 가구 등 주거취약 고령세대는 이번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애를 더 낳으면 물량을 준다, 평형을 늘려준다”는 보너스 제도를 운용함으로써, 정책 실효성이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주거복지와 상당히 동떨어진 형태로 작동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서울 아파트의 중위 전세가격은 5억6333만원(2025년 7월 기준)으로 4억을 훌쩍 넘어선다. ‘시세의 80%’라는 미리내집만의 보증금 산정 공식 역시 정부 대출정책과 충돌한다.
부동산 업계 전문가는 "서울시의 2차 장기전세, 미리내집은 명백한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표본이다"면서 "많은 자녀와 수년간 힘들게 지내온 실수요자인 4050 무주택자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2030 돈많은 신혼부부, 이른바 부자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탁상행정식 정책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수요자 입장에서는 “시세보다 싸다”는 정책홍보마저 무의미하다. 목돈이 부족해 공공임대주택 문을 두드리는 신혼부부에게 수도권 기준 7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은, 실질적으로 고액 자산가에게만 '특혜'의 문을 여는 결과와 같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금융권에선 일반 은행 대출을 써야 하므로 이자 부담 역시 문제로 지목된다.
최근 서울시는 정책의 한계를 의식해 비(非)아파트, 오피스텔 등 물량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정부의 규제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실수요자 현실과의 괴리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