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윤슬 기자] 러시아 국영 로켓 기업 에네르기아(Energia)가 분당 5회 회전으로 지구 중력의 50% 수준 인공중력을 구현하는 새로운 우주정거장 구조 특허를 취득하며, ‘걷고 뛰는 우주’ 시대를 여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1998년부터 운영돼 2030년 퇴역 예정인 국제우주정거장(ISS) 이후 장기 유인 비행의 건강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차세대 플랫폼 구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실제 건설·운용까지 이어질지는 기술·예산·국제정치 변수로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허 내용: 반지름 40m, 분당 5회전, 0.5g
영국 텔레그래프와 미국 우주 전문매체 스페이스닷컴에 따르면, 에네르기아는 최근 러시아연방 지식재산권청에 회전 방식 인공중력 우주정거장 설계를 출원해 특허를 확보했다. 특허 문서와 이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중앙에 고정 축(스태틱 모듈)을 두고, 여기에 회전 모듈과 십자(+) 또는 선풍기 날개처럼 뻗은 거주 모듈이 방사형으로 연결된 형태다.
거주 모듈은 중심으로부터 약 40m 떨어진 위치(직경 80m)에 배치되며, 전체 구조가 분당 약 5회 회전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속도와 반지름을 조합하면 가장 바깥쪽 거주 구역에서 지구 표면 중력의 약 50%(0.5g)에 해당하는 ‘겉보기 중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특허는 설명한다.
왜 0.5g·5rpm인가: 인간 생리와 공학의 절충
인공중력 설계에서 핵심 변수는 회전 속도와 반지름이다. 회전수가 낮을수록(예: 1~2rpm) 인체의 어지러움·멀미는 줄지만, 동일한 인공중력을 얻으려면 반지름을 수백m 이상 키워야 해 구조·비용 부담이 폭증한다. 반대로 반지름을 40~80m 수준으로 줄이면 4~6rpm 정도의 비교적 빠른 회전이 필요해, 코리올리 효과로 인한 방향감각 혼란·멀미 등 인간 생리 문제가 부각된다.
현재 우주의학·인체 실험 결과를 종합하면 4rpm 안팎까지는 적응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나오지만, 장기간 노출에 대한 체계적 데이터는 부족해 5rpm·0.5g 조합이 실제로 어느 수준까지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될지는 추가 실험 없이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포스트 ISS’ 패권전: ROSS·루나 게이트웨이·상업 우주정거장
ISS는 미국·러시아·유럽·일본·캐나다 등이 1998년 첫 모듈을 쏘아 올린 뒤 20년 넘게 운영해온 인류 최대의 공공 우주 인프라지만, 궤도 노후화와 비용 문제로 2030년 퇴역이 예정돼 있다. 러시아는 자국 모듈을 기반으로 한 ‘러시아 궤도 우주정거장(ROSS)’을 구상하고 있으며, 에네르기아 특허 구조가 향후 ROSS의 인공중력 모듈로 활용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은 달 궤도 전초기지 ‘루나 게이트웨이’와 더불어, 액시엄 스페이스·보잉·노스럽그루먼·블루오리진 등 민간과 손잡고 저궤도 상업용 우주정거장(LEO Commercial Destinations)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미국 스타트업 배스트(Vast)가 구상한 ‘헤이븐(Haven)’ 역시 회전 구조를 활용한 인공중력 모듈을 장기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러시아 특허와 콘셉트가 유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주인 건강 문제: 왜 ‘인공중력’인가
현재 ISS에서 생활하는 우주인들은 사실상 무중력에 가까운 환경에서 6개월~1년씩 지내며 골밀도 감소, 근육 위축, 심혈관 기능 약화, 면역체계 변화, 시력 및 인지 기능 저하 등 다양한 건강 문제에 직면해 있다. 미·러·유럽 등은 하루 2시간 이상 고강도 운동, 탄성 장비, 약물 등으로 이를 완화하고 있으나, 1년 이상 체류와 화성·소행성 탐사 같은 심우주 장기 미션을 고려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NASA와 스탠퍼드대가 1975년 제안한 ‘스탠퍼드 토러스(Stanford Torus)’는 지름 1.8km 도넛형 구조를 분당 1회 회전시켜 0.9~1.0g 수준 인공중력을 만들며 최대 1만명을 수용한다는 구상이었지만, 당시 기술·예산 여건상 실현되지 못했다. 2010년대 나사가 추진했던 회전형 모듈 개념 ‘노틸러스-X(Nautilus-X)’ 역시 예산 문제로 2011년 전후 개발 중단을 맞으면서 인공중력은 오랫동안 ‘SF에 가까운 아이디어’로 남아 있었다.
현실성 논쟁: 궤도 조립·도킹·운영 리스크
에네르기아 특허가 제시한 40m 반지름, 5rpm, 0.5g 구조는 물리적으로는 공학적 타당성을 인정받지만, 실제 궤도에서 구현하려면 여러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선 직경 80m급 대형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ISS처럼 여러 모듈을 수차례에 걸쳐 발사·도킹해 궤도에서 조립해야 하는데, 회전 구조 특성상 조립 단계에서는 정지 상태로 운영하다가 완성 후 가속·회전을 시작해야 한다는 설계·운영 복잡성이 따른다.
회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신규 화물선·유인선 도킹 시 ‘회전 동기화’ 문제도 크다. 특허를 분석한 일부 기술 매체는 접근·도킹 과정에서 회전 속도를 조정하거나, 회전하지 않는 별도 도킹 모듈·축 부분을 두는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해 “전반적인 안전 여유(safety envelope)를 줄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우주예산 축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과의 협력 축소, ROSS 일정 지연 등 현실 변수까지 고려하면, 이번 특허가 ‘기술적 선점’ 이상의 실제 하드웨어로 이어질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SF에서 특허로: 치올콥스키·폰 브라운·‘2001’의 유산
회전형 인공중력 우주정거장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지 않다. 러시아 로켓 공학의 선구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와 슬로베니아계 과학자 헤르만 포토츠니크(1892~1929)는 20세기 초 이미 회전 구조를 통한 인공중력 개념을 제안했으며, 독일·미국에서 활동한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도 회전식 우주정거장을 지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중에게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등장한 거대 바퀴형 우주정거장이 상징적이다. 영화 속 구조물은 대략 분당 1회 회전으로 달 중력 수준(약 1/6g)에 해당하는 인공중력을 구현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에네르기아 특허는 이보다 훨씬 강한 0.5g을 목표로 해 ‘SF에서 현실 기술 설계로의 진화’라는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한국·민간 우주에의 시사점
에네르기아 특허는 러시아의 독자 우주정거장 구상이라는 지정학적 맥락뿐 아니라, ‘누가 포스트 ISS 시대의 인공중력 기술 표준을 선점하느냐’를 둘러싼 장기 경쟁의 신호로 읽힌다.
한국 역시 누리호·차세대 발사체, 달 탐사 등으로 유인·장기체류 논의에 서서히 발을 들이고 있어, 향후 한국형 우주정거장·유인 모듈을 설계할 때 인공중력 도입 여부와 수준(0.3g·0.5g·1g 등), 회전 반지름·rpm 조합에 대한 자체 연구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최근 미국 스타트업과 유럽 업체들이 제안하는 상업용 회전식 우주정거장, 러시아의 특허, 나사의 과거 연구 축적까지 감안하면, 인공중력은 더 이상 ‘공상과학’이 아니라 포스트 ISS 시대 우주경제의 새로운 기술·시장 표준을 둘러싼 경쟁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