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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래비의 커리어 블렌딩] 전문가라는 함정, 'Content Free'로 넘어서다

래비의 커리어 블렌딩 ⑫

 

학습혁신담당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팀원에게 질문을 받았다.
"담당님은 이 업무를 안 해보셨잖아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세요?"


칭찬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으로 보였다. 본인이 수년간 다뤄온 교육 실무 영역이 나에게는 처음 맡는 영역이라 생소할 텐데, 어떻게 맥락을 금방 파악하고 속도감 있게 움직이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꽤 명확하게 대답했다.

 

"기획의 본질은 콘텐츠, 그러니까 내용물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요. 콘텐츠는 매번 달라지지만, 구조를 세우고 맥락을 읽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흐름을 설계하는 건 어떤 아젠다든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주니어 때부터 '무엇의 전문가'가 아닌, 콘텐츠에서 자유로운 기획 전문가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팀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 말이 바로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까.

 

◈ 첫 번째 블렌딩: Content Free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교육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교재에서 본 한 문장을 잊을 수 없다. '비즈니스 민감성에 기초한 Content Free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Content Free란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지식의 유효기간에 묶이지 않고, 비즈니스의 변화에 맞춰 전문성을 끊임없이 재조합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교육 담당자가 스스로를 '교육하는 사람'으로만 규정하면 결국 조직이 필요로 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단순히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데 매몰되면 '교육 담당자'라는 좁은 틀에 갇히지만, 비즈니스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안하는 사람은 전략적 HRD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땐 100% 이해가 어려웠지만, 이후 조직에서 내게 경력과 상관없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업무를 부여했을 때, 문득문득 그 단어를 떠올렸다. 내용물이 바뀌는 것이지, 일하는 나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13년이 지난 지금, 그 한 줄은 비로소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 두 번째 블렌딩: 콘텐츠에 갇히면 변화 앞에서 멈춘다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습관적으로 콘텐츠에 기대어 말한다. "저는 리더십 교육 담당자입니다.", "저는 식품 마케터입니다.", "저는 평가/보상 전문가입니다." 처럼. 그 타이틀이 나를 설명해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나는 20년 동안 이 일만 한 전문가야"라는 말은 오늘날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 나를 새로운 시도로부터 격리하는 담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까. 나는 타이틀 대신 '방식'을 먼저 익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학습혁신담당이 된 뒤,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내가 해 온 과업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매번 콘텐츠는 달랐지만 일의 본질은 같았다. 기획의 틀, 소통의 방식,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체득한 사람은 콘텐츠가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반도체에서 식품으로, 마케팅에서 HR로 도메인이 바뀌어도 처음엔 어렵겠지만 성과를 내는 로직은 분명 동일하다. 내가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설적으로 '나는 이 분야의 고정된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콘텐츠는 학습하고 채워 넣으면 되지만, 비즈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감각은 콘텐츠를 바꿔도 남아 있다. 그것이 진짜 전문성이다.

 

◈ 세 번째 블렌딩: AI 시대, Content Free는 생존 전략이다

 

AI가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는 훨씬 더 날카로운 맥락을 얻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은 AI가 며칠이면 따라오고, 산업의 지형은 분기마다 뒤집힌다. '무엇을 아는가'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AI가 콘텐츠를 빠르게 채울 수 있다면, 인간에게 남는 경쟁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맥락을 읽고, 문제를 정의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Content Free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명제가 AI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 와중에 살아남는 사람은 특정 콘텐츠의 전문가가 아닌, 어떤 콘텐츠든 자기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만난 Content Free라는 단어가 13년이 지나 비로소 내 몸에 새겨졌듯, 어떤 깨달음은 시간이 걸린다.

 

지금 당장 와닿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스스로를 하나의 타이틀 안에 가두지는 말자. 오늘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 전문성이, 혹시 당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제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길 바란다.

 

[래비가 제안하는 커리어 블렌딩 질문]
STEP 1.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 '어떻게' 잘하는 사람인가?
자기소개에서 직무명을 빼고 나를 설명해 보자. 그때 남는 것이 당신의 진짜 전문성이다.
STEP 2. 지금 내 타이틀이 사라진다면, 나는 내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분야가 아니라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할 때, 변화는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무대가 된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사람과 조직의 성장을 고민하는 코치이자 교육·문화 담당자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실무 경험과 워킹맘의 일상을 재료 삼아, 지나온 모든 순간이 어떻게 현재의 나로 '블렌딩'되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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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 Hands up] 빼앗긴 들에 도파민 루프가 오는가…자녀 도파민, 부모 세대로 도파민 역이전중

“요즘 운동회는 무조건 무승부로 마무리한데요. 지는 팀이 생기면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자존감이 하락한다고 엄마들이 컴플레인 한다더라구요.” “저도 들었는데 요즘엔 상장도 교실에서 안 주고 따로 교장실로 불러서 개별적으로 전달한대요. 못 받은 애들이 상처받고 위축 될까봐.” 회사 점심시간, 예비 초딩 엄마들의 도파민 터지는 대화에 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얼마 전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지인에게 ‘망원경으로 교실을 감시하는 학부모’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적잖이 충격이었는데, 이건 새로운 결의 충격이다. ◆ 빼앗긴 들의 학생들 아무리 학창시절이 즐겁다 해도 학교생활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학업과 사회성 두 측면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할 아이들에게는 지속을 위한 자극제가 필요한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도파민’이다. 필자의 과거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참 많은 도파민 유발 인자들이 있었다. 점심시간 대충 밥을 털어 넣고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반 대항 축구시합을 하곤 했는데, 한 운동장에서 열 팀의 경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혼돈의 카오스지만 기어이 골을 넣어 이겼을 때의 짜릿함은 오후 수업 내내 가라앉질 않았다. 선

[내궁내정] “코끼리 뼈 없는 상상은 몽상일 뿐"… AI 시대 新인재 조건 ‘견골상상’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상상(想象)은 언제부터인가 “아무 근거 없이 떠올리는 자유로운 공상”과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 하지만 한자 상상(想象)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 본래 의미는 정반대에 가깝다. ‘견골상상(見骨想象)’이라는 고사에서 보듯, 상상이란 허공이 아니라 코끼리의 뼈라는 단단한 팩트 위에서만 비로소 작동하는 인식 능력이었다. 코끼리 뼈를 보고 코끼리를 그리다…‘견골상상’의 원형 중국 전국시대 법가 사상가 한비가 쓴 『한비자』에는 “견골상상(見骨想象)”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뼈를 보고 코끼리의 형상을 그린다”는 뜻이다. 전국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인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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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비의 커리어 블렌딩] 직장인의 이미지 자산…실력만큼 중요한 패키징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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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인사이트] 스끼다시였던 갈등 소재, 본 주제는 따로 있었다…<원정빌라>를 보고

어릴 적 이런 형태의 주거 공간을 자주 보곤 했다. ‘빌라, 멘숀, 빌리지…’ 직접 살아본 적은 없지만 이와 같은 이름들이 묘하게 익숙하다. 예고편과 스틸컷을 훑는 순간, 객관적 지표와는 무관하게 심박이 먼저 반응했다.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주말의 끝에서 선택한 작품이 티빙의 <원정빌라>다. 톱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연출이나 서사가 압도적일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평점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소재가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끌렸다. ‘현대판 이웃사촌 비극 스릴러인가.’ 평소 반전과 긴장감을 선호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몰입했다. OTT 작품답게 러닝타임도 부담스럽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쁘지 않았다. 시간을 보내기에는 무난하다. 다만 반전의 결이 비교적 예상 가능한 범주에 머물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갈등은 전채였고, 본편은 사이비였다 층간소음, 주차 문제, 사소한 시비. 공동주택에서 흔히 벌어지는 갈등이 주요 서사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작품은 그 틀을 비껴간다. 오히려 그 모든 갈등은 본편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채에 가깝다. 실제 중심축은 ‘사이비 종교’다. 이는 ‘나는 신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PD

[래비의 커리어 블렌딩] 전갈과 개구리, 200회의 워크숍이 알려준 진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동기부여를 받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다. 똑같은 팀장의 피드백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극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망치는 말이 된다. 퍼실리테이션을 배우고 나서도 이 질문만큼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뭘까?' 조직의 소통 방식은 조금 알게 됐지만, 그 안에 있는 '개인'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결국 그 답을 찾아 심리 진단 도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국민 진단 도구라 불리는 MBTI는 입문이었다. 그 다음은 에니어그램이었다. MBTI가 행동유형을 보여준다면, 에니어그램은 그 행동의 뿌리에 있는 두려움과 욕망을 건드린다. 처음 내 에니어그램 유형을 확인했을 때, 솔직히 좀 민망했다. '내 마음속에 이런 욕구가 있었나?' 그 불편함이 오히려 흥미와 이해의 기반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한 버크만 진단까지 손을 뻗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드러나는 숨은 욕구를 찾아내며 일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진단 도구였다. 닥치는 대로 공부했고, 하나씩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확신이 줄었다. 나조차도 나의 행동을 이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