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혁신담당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팀원에게 질문을 받았다.
"담당님은 이 업무를 안 해보셨잖아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세요?"
칭찬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으로 보였다. 본인이 수년간 다뤄온 교육 실무 영역이 나에게는 처음 맡는 영역이라 생소할 텐데, 어떻게 맥락을 금방 파악하고 속도감 있게 움직이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꽤 명확하게 대답했다.
"기획의 본질은 콘텐츠, 그러니까 내용물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요. 콘텐츠는 매번 달라지지만, 구조를 세우고 맥락을 읽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흐름을 설계하는 건 어떤 아젠다든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주니어 때부터 '무엇의 전문가'가 아닌, 콘텐츠에서 자유로운 기획 전문가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팀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 말이 바로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까.
◈ 첫 번째 블렌딩: Content Free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교육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교재에서 본 한 문장을 잊을 수 없다. '비즈니스 민감성에 기초한 Content Free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Content Free란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지식의 유효기간에 묶이지 않고, 비즈니스의 변화에 맞춰 전문성을 끊임없이 재조합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교육 담당자가 스스로를 '교육하는 사람'으로만 규정하면 결국 조직이 필요로 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단순히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데 매몰되면 '교육 담당자'라는 좁은 틀에 갇히지만, 비즈니스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안하는 사람은 전략적 HRD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땐 100% 이해가 어려웠지만, 이후 조직에서 내게 경력과 상관없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업무를 부여했을 때, 문득문득 그 단어를 떠올렸다. 내용물이 바뀌는 것이지, 일하는 나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13년이 지난 지금, 그 한 줄은 비로소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 두 번째 블렌딩: 콘텐츠에 갇히면 변화 앞에서 멈춘다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습관적으로 콘텐츠에 기대어 말한다. "저는 리더십 교육 담당자입니다.", "저는 식품 마케터입니다.", "저는 평가/보상 전문가입니다." 처럼. 그 타이틀이 나를 설명해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나는 20년 동안 이 일만 한 전문가야"라는 말은 오늘날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 나를 새로운 시도로부터 격리하는 담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까. 나는 타이틀 대신 '방식'을 먼저 익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학습혁신담당이 된 뒤,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내가 해 온 과업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매번 콘텐츠는 달랐지만 일의 본질은 같았다. 기획의 틀, 소통의 방식,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체득한 사람은 콘텐츠가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반도체에서 식품으로, 마케팅에서 HR로 도메인이 바뀌어도 처음엔 어렵겠지만 성과를 내는 로직은 분명 동일하다. 내가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설적으로 '나는 이 분야의 고정된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콘텐츠는 학습하고 채워 넣으면 되지만, 비즈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감각은 콘텐츠를 바꿔도 남아 있다. 그것이 진짜 전문성이다.
◈ 세 번째 블렌딩: AI 시대, Content Free는 생존 전략이다
AI가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는 훨씬 더 날카로운 맥락을 얻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은 AI가 며칠이면 따라오고, 산업의 지형은 분기마다 뒤집힌다. '무엇을 아는가'만으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AI가 콘텐츠를 빠르게 채울 수 있다면, 인간에게 남는 경쟁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맥락을 읽고, 문제를 정의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Content Free가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명제가 AI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 와중에 살아남는 사람은 특정 콘텐츠의 전문가가 아닌, 어떤 콘텐츠든 자기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학원 교재에서 만난 Content Free라는 단어가 13년이 지나 비로소 내 몸에 새겨졌듯, 어떤 깨달음은 시간이 걸린다.
지금 당장 와닿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스스로를 하나의 타이틀 안에 가두지는 말자. 오늘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 전문성이, 혹시 당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제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길 바란다.
[래비가 제안하는 커리어 블렌딩 질문]
STEP 1.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 '어떻게' 잘하는 사람인가?
자기소개에서 직무명을 빼고 나를 설명해 보자. 그때 남는 것이 당신의 진짜 전문성이다.
STEP 2. 지금 내 타이틀이 사라진다면, 나는 내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분야가 아니라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할 때, 변화는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무대가 된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사람과 조직의 성장을 고민하는 코치이자 교육·문화 담당자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실무 경험과 워킹맘의 일상을 재료 삼아, 지나온 모든 순간이 어떻게 현재의 나로 '블렌딩'되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담아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