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혼자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노트북만 두드리는 회의. 뒷자리에 앉아 속으로 되뇌던 말. '이럴 거면 그냥 메일로 보내시지.'
그 불만이 문제의식으로 바뀐 건, 내가 직접 그 회의를 이끌어야 하는 프로젝트 리더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였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던 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익숙한 책상과 묵직한 과제들이었다. '회사의 가치체계 재정립 프로젝트' 머리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손은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실무를 떠나 있던 시간만큼의 공백감이 매일 아침 출근길을 조금 무겁게 했다.
그 무게감보다 더 버거웠던 건, 회의실에서 마주하는 침묵이었다. 대부분 리더가 말을 주도 했는데 어딘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들의 진짜 생각이었지만, 직급과 분위기라는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그건 좀처럼 꺼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저 침묵을 깰 수 있을까?'
그때 만난 것이 퍼실리테이션이었다.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기술보다 태도였다. 답을 알고 있어도, 먼저 꺼내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펼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배운 것을 회사 밖에서 먼저 써보기로 했다. 비영리 단체를 대상으로 미션과 비전을 함께 도출해 주는 프로보노 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좋은 취지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회사라는 안전망 없이도 통할까?'라는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 더 컸다.
현장은 예상과 달랐다. 비영리라고 조직의 고민이 작은 게 아니었다. 방향을 잃은 채 관성으로 운영되던 단체가 스스로 자신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말로 꺼내고 정리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장해 갔다. 그 속에서 나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 안에 있던 말들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고 이 것이 퍼실리테이션의 핵심임을 배웠다.
퍼실리테이션은 단순한 회의 기술이 아닌, 흩어진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의 맥락을 찾아 하나의 방향으로 묶어내는 것에 있다. 그 '사고의 구조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 경험이 모아져 확신이 되고 난 인증퍼실리테이션(CF)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부서 간 이해관계가 얽혀 겉돌던 회의, 말은 많은데 결론은 없던 회의 앞에서 나는 마커를 들고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사람들이 던지는 말을 받아서, 쓰고, 연결하고, 묶었다. 그렇게 조금씩 지루한 회의가 달라졌다.
어느 날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말을 건넸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게 즐겁죠?" 이 말이 꽤 오래 남았다.
복직 후 나를 옥죄던 초조함이 그즈음부터 조금씩 옅어졌다. 공백을 걱정하며 돌아온 사람에서, 회의실의 흐름을 읽고 설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자격증 취득, 프로보노 한 번이 만들어낸 작은 변화지만 그 작은 것이 쌓여 오늘 내 커리어에 지렛대가 되었다.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회의실이 답답하다면, 그 답답함을 불만으로만 쌓아두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는 대신 '이 구조를 바꾸려면 내가 뭘 배워야 할까?' 그 질문이, 다음 챕터의 시작일 수 있다.
[래비가 제안하는 커리어 블렌딩 3단계 질문]
STEP 1. 회의실의 불만을 성장의 단서로 삼고 있는가?
-수직적이고 비효율적인 회의에 뒤에서 투덜거리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직 안에서 느끼는 그 '답답함'은 어쩌면 내가 새로운 역량을 배워야 할 가장 좋은 타이밍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STEP 2.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나만의 도구'가 있는가?
-남을 설득하거나 회의를 이끌기 위해서는 내 머릿속이 맑아야 한다. 쏟아지는 정보와 얽힌 문제들을 시각화하고 분류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가?
STEP 3. 낯선 환경에서 내 무기를 실험해 본 적이 있는가?
-회사에서 당장 새로운 시도가 부담스럽다면, 프로보노나 외부 커뮤니티에서 먼저 작게 테스트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밖에서 얻은 작은 성공이 본업을 더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돌아온다.
[10화 예고]
퍼실리테이터로서 조금씩 상장하는 래비. 하지만 화이트보드 앞을 벗어나 현장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었다.
"같은 피드백을 줘도 왜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까? 각자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왜 이렇게 다를까?"
조직이라는 시스템을 넘어 '개인'에 대한 호기심은 결국 그녀를 새로운 배움으로 이끌었다. 에니어그램(Enneagram)부터 버크만(Birkman) 등 다양한 사람의 탐구가 시작된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사람과 조직의 성장을 고민하는 코치이자 교육·문화 담당자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실무 경험과 워킹맘의 일상을 재료 삼아, 지나온 모든 순간이 어떻게 현재의 나로 '블렌딩'되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담아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