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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커리어 블렌딩] 당신의 기획이 안 먹히는 진짜 이유

래비의 커리어 블렌딩 ③

 

1. 내용은 완벽한데, 왜 설득이 안 될까?

 

밤새 만든 기획서가 상사의 이메일함에서 며칠째 머물러 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캠페인인데 직원들 반응은 생각보다 차갑다. 회의에서 야심 차게 설명했지만, 누구도 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용은 좋았다. 논리도 탄탄했다. 그런데 왜 안 먹혔을까? 뭐가 부족하지?

 

그때는 몰랐지만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이 기획들에 부족했던 건 더 나은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 즉 맥락(Context)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고민이 많았던 첫 직장, 온라인 영화 마케팅 회사에서 배운 것이었다.

 

2. 두 세계의 충돌: 냉혹한 영화판 vs 원칙의 HR

 

20대 중반, 나는 온라인 영화 홍보 마케터로 일했다. 영화판은 냉혹했다. 수년을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도 개봉 초반에 관객을 끌어오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극장에서 내려왔다. 그래서 마케터들은 이미 입소문이 난 대작일지라도 모든 역량을 ‘매력적인 예고편’에 쏟아붓고, 흥미를 줄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예술적 메시지 보다는 관객이 “이건 봐야겠다”고 느낄 만한 단서, 즉 셀링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이후 HR 관련 업무로 전환했을 때, 두 세계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영화판이 화려함과 속도의 세계라면, HR은 원칙과 체계의 세계였다. 처음엔 영화판 경험은 여기서 쓸모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의 충돌을 겪으며 그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3. 예고편 없는 기획의 실패

 

첫 번째 충돌은 핵심가치 교육 기획에서였다. 배경과 현황, 문제 정의와 해결 방안까지 빠짐없이 담은 20페이지 기획서를 올렸지만, 상사는 읽지 않았다. 돌아온 피드백은 단순했다. “너무 길어.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상사에게 예고편 없는 3시간짜리 예술영화를 들이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 번째 충돌은 “Why We Work(우리는 왜 일하는가?)” 조직문화 캠페인이었다. 직원들에게 일의 의미와 자부심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왜 일하긴, 돈 벌려고 하지. 몰라서 묻나?” 나는 회사가 하고 싶은 말을 중심으로 생각했지, 직원이 실제로 품고 있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이 역시 예고편이 없는 기획이었다. 회사의 언어로 말했으니, 직원의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다.

 

4. 사람을 움직이는 3단계 법칙

 

실패를 인정한 뒤, 나는 다시 과거의 경험을 꺼내 들었다. 영화 마케팅과 HR은 겉보기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이다. 영화 흥행에는 늘 세 단계가 있었다.

 

먼저 시선을 멈추게 하는 ‘주목’, 다음으로 “나도 보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공감’, 그리고 실제로 티켓을 끊게 만드는 ‘참여’다. 나는 이 구조를 HR 기획에 그대로 적용해 보기로 했다.

 

5. 블렌딩의 적용: HR에 마케팅을 입히다

 

먼저 ‘주목’ 단계에서 나는 기획서의 구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영화는 결말을 숨기지만, 비즈니스 기획서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루한 현황 분석 대신, 첫 문단에 기대 효과를 배치했다.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이직률 5% 감소, 교육 비용 20% 절감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A4 한 장짜리 요약본을 맨 앞에 붙였다. 상사가 이 한 장을 보고 “이건 봐야겠네”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것이 비즈니스 기획의 예고편이었다.

 

‘공감’ 단계에서는 회사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했다. 아쉬웠던 “Why We Work” 대신 “What’s Your Next?”라는 질문을 다시 적용해 보았다.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 대신, 커리어 고민을 나누는 코칭과 실제 업무에서 적용되는 스토리를 워크숍에 연결하여 회사가 단순히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 ‘참여’ 단계에서는 직원을 관객이 아니라 서포터즈로 대했다. 전사 공지 전, 파일럿 그룹을 먼저 모집해 제도를 체험하게 했고 그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수정한 뒤 정식으로 프로그램을 런칭했다. 그들이 동료에게 추천하는 순간, 제도는 ‘인사팀의 정책’이 아니라 ‘동료가 써보고 권하는 선택지’가 된다.

 

6. 블렌딩의 본질: 경험을 번역하라

 

나는 영화 마케터의 스토리텔링을 HR의 진정성과 섞었다. 블렌딩의 핵심은 과거를 그대로 가져오는 데 있지 않다. 과거의 원리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아직 해석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의 지난 경험 속에도 현재와 연결되는 순간은 반드시 있다. 그 원리를 찾아 지금의 일에 섞어보라. 그 낯선 조합이 당신을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4화 예고]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팔고 있는가." 화려한 예고편 안에 담겨야 할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 나는 다음 커리어인 브랜드 컨설팅의 세계로 들어갔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사람과 조직의 성장을 고민하는 코치이자 교육·조직문화 담당자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실무 경험과 워킹맘의 일상을 재료 삼아, 지나온 모든 순간이 어떻게 현재의 나로 '블렌딩'되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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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블렌딩] 당신의 기획이 안 먹히는 진짜 이유

1. 내용은 완벽한데, 왜 설득이 안 될까? 밤새 만든 기획서가 상사의 이메일함에서 며칠째 머물러 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캠페인인데 직원들 반응은 생각보다 차갑다. 회의에서 야심 차게 설명했지만, 누구도 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용은 좋았다. 논리도 탄탄했다. 그런데 왜 안 먹혔을까? 뭐가 부족하지? 그때는 몰랐지만 경험이 쌓여가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이 기획들에 부족했던 건 더 나은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 즉 맥락(Context)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고민이 많았던 첫 직장, 온라인 영화 마케팅 회사에서 배운 것이었다. 2. 두 세계의 충돌: 냉혹한 영화판 vs 원칙의 HR 20대 중반, 나는 온라인 영화 홍보 마케터로 일했다. 영화판은 냉혹했다. 수년을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도 개봉 초반에 관객을 끌어오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극장에서 내려왔다. 그래서 마케터들은 이미 입소문이 난 대작일지라도 모든 역량을 ‘매력적인 예고편’에 쏟아붓고, 흥미를 줄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예술적 메시지 보다는 관객이 “이건 봐야겠다”고 느

[콘텐츠인사이트] 여전히 이런 호러무비가 만들어지다니…<언틸 던:무한루프 데스게임>을 보고

공포영화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이나 <13일의 금요일> 같은 슬래셔 무비도 봤고, 잔인하지만 신선했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도 꽤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과거 홍보까지 했던 작품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쏘우> 시리즈다. 현실 기반 공포를 바탕으로 스릴러를 깔고, 아무리 비현실적인 설정이라 해도 영화적 개연성을 놓치지 않으며 퍼즐 맞추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죽어도 다시 되돌아오거나, 하루가 반복되는 ‘루프 구조’ 영화는 이미 부지기수다. 그래도 넷플릭스 신작이 신선한 공포물일 것 같아 주말을 붙잡고 봤는데, 결론적으로는 정말 처참했다. ◆ 반전도 약하고, 설명도 부족한 이야기 예측 가능한 범인, 예측 가능한 행동,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결말. 모래시계가 뒤집히면 등장인물들이 죽기 직전으로 돌아가는 설정 역시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이해하는 척 보고는 있지만 불편하다. 원리도, 근거도, 환경도, 동기도 모두 허술하다. 아직도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 가

[Future Hands up] 냄새는 분자이기 때문에 털어낼 수 있다

“먼지도 아니고 냄새 나는 게 턴다고 털어지니?” 중국집 홍보대사라도 된 것 마냥 온몸에 짜장 향을 휘감은 채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장 동료가 사무실 한 구석에서 온몸을 툭툭 두드리며 털고 있었다. 이를 본 화자가 의아한 듯 물었더니 그는 제법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냄새는 분자 니까요.” 그렇다. 냄새는 분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냄새를 일으키는 것은 분자다. 우리가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것은, 공기 중에 떠도는 특정 분자가 우리의 코로 들어와 코 속 후각 수용체에 붙게 되고, 여기서 발생되는 전기신호를 우리의 뇌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직장 동료의 분자 털기 행동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제법 의미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실수의 냄새] 아무리 AI급 완벽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직장인이라 할 지라도 실수의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런 실수 중 소위 ‘사고’ 급의 실수는 마치 배어버린 냄새 와도 같아 그 향이 한동안 내 주위를 머무는데, 자꾸 스멀스멀 올라오는 과거의 실수 향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은 채 또다른 실수를 유발시키는 고약한 녀석이다. 물론 우리는 실수를 통해 어떠한 부분이 잘못되었고, 앞으로는 이러한

[콘텐츠인사이트] ’가족‘의 참된 의미 보여준 명품 드라마… <러브 미> 최종화를 보고

간만에 제대로 된 명품을 만난 기분이다. 지지고 볶고 울고 웃기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볼 만한 드라마는 많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의 것을 건드렸다. 등장인물의 독백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 닿았고, 문화 사대주의는 아니지만 원작이 해외에 있어 그런지 완성도가 매우 높다고 느꼈다. 배경이 어떻고 연출이 어떻고 볼거리가 풍성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드라마의 힘은 훨씬 단단한 곳에 있다. 가족의 ‘해체’가 전성시대인 지금, 가족의 ‘결합’을 담백하면서도 묵직하게 보여준 데 있다. 이게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드는 이유다. 이제는 1인 가구가 하나의 가구 형태로 당당히 인정받는 시대다. 나아가 반려견과 반려묘도 법적 구성원은 아니지만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 즉 또 하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극 속 인물 구성은 그야말로 현대 가족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어느날 갑자기 맞이한 미혼부, 사회적 지위는 의사지만 그 미혼부를 사랑하게 된 외로운 여자, 백수와 취업을 오가는 여자의 답없는 동생, 그 동생을 짝사랑하다 스타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여사친,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 후 다시 영화처럼 사랑을 만났지만 결국 알츠하이머 병에

[콘텐츠인사이트] 로코를 애써 보지는 않지만… <이사랑 통역 되나요>를 보고

딱히 이유는 없지만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즐겨 보지 않는다. 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등장해 알콩달콩 관계가 진전되고, 중간에 시련과 반전이 찾아왔다가 결국 사필귀정으로 귀착되는 기본 구도가 어딘가 성의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로맨스’ 자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맨스 스릴러’나 ‘로맨스 드라마’는 즐겨 봤다. <갯마을 차차차>나 <우리들의 블루스>도 한 회도 빠짐없이 챙겨봤다. 아마 내겐 코미디적 감각보다 감정의 결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주말이라고 해도 한가롭지 않다. 더구나 큰아이가 고3이 되는 해라 이래저래 눈치도 보고, 각자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면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함께 보는 시간이야말로 귀한 여유가 된다. 이번 주말, 우리의 선택은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이하 ‘이통되’)였다. 사실 두 번째 회차 시청이었는데 이번에는 이거다 싶은 느낌이 왔다. 한동안 은퇴설까지 나돌았던 김선호 배우의 복귀와 <무빙>에서 호평받았던 히로인의 조합까지 더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정만 보면 어처구니없다. 전직 무명 여배우가 하루아침에 글로벌 셀럽이 되

[콘텐츠인사이트] 진짜와 가짜, 그리고 본질…다시 봐도 수작 <사이비>를 보고

몇 년도 작품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 넷플릭스엔 꽤 많고, 신작이 별로이거나 업데이트가 뜸할 때면 리모컨을 들고 이곳저곳을 탐침하듯 둘러본다. 주말 아침 눈에 들어온 작품은 연상호 감독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린 애니메이션 <사이비>였다. 살다 보면 자주 쓰지만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단어가 있다. ‘사이비’가 그랬다. 사전을 찾아보니 ‘닮았지만 아닌 것’, 즉 겉은 비슷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상태를 의미한다. ◆ 넘쳐나는 ‘사이비’의 시대 도처가 사이비의 천국처럼 보인다. 종교 영역에서 많이 들리는 단어이지만, 짝퉁은 물론이고 원조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오리지널이라 우기는 존재들이 곳곳에서 활개 친다. 유통 시장에서의 미투 상품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신앙심 깊은 목사라 믿었던 이들 중 일부가 알고 보면 허세와 사기만 앞세운 경우도 적지 않다. 문제는 이를 진짜라고 믿는 데 있다. 그럴듯한 외양과 서사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본질이 100이라면 98은 실체에 충실하지만, 2만큼의 자의적 해석으로 진짜를 부정하는 방식이다. 더 안타까운 건 종교적 믿음이라는 포장을 통해 헌금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