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나름 인정받고 있었고, 대학원에서는 마지막 관문인 '졸업 논문' 착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논문만 딱 끝내고, 예쁜 쌍둥이 낳아서 완벽하게 졸업해야지."
모든 계획은 내 머릿속에서 완벽했다.
하지만 삶은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졸업 논문 주제 선정 후 본격적으로 착수하려던 찰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임신성 고혈압'. 몸이 비명을 질렀고, 아이들은 예고도 없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빠른, 1kg 남짓한 칠삭동이 쌍둥이였다.
태어나자마자 내 품이 아닌 차가운 인큐베이터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무너져 내렸다.
내 계획, 내 커리어, 그리고 엄마로서의 기쁨까지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부렸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대학원을 오갔던 날들, 회사 일을 놓지 못해 자처했던 야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나를 괴롭혔다.
아이를 가진 채로 내가 너무 무리해서, 내 욕심이 아이들을 저 차가운 유리 상자 안에 가둔 건 아닐까? 말로 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논문이 발목을 잡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기업 현장에 나가 설문도 돌리고 인터뷰도 해야 하는 시점에 캥거루 케어로 아이들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학기 졸업은 포기해야겠다. 아니, 어쩌면 영영 논문은 못 할 수도 있겠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그때 사정을 들은 지도 교수님께서 동아줄 같은 제안을 주셨다.
"래비님, 지금 상황에서 논문을 위해 현장 조사는 무리예요. 대신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라는 방법이 있어요. 래비님이 그동안 회사에서 치열하게 했던 조직문화 활동, 그건 이미 살아있는 데이터잖아요? 그걸로 케이스를 써보는 게 어때요?"
멍했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맞아, 지금 현장에 나갈 순 없지만, 내 안에는 이미 현장의 경험이 쌓여 있잖아.'
그 제안은 벼랑 끝에서 만난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퇴원하기를 기다리며 집에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이 졸업작품을 완성하면, 우리 아이들도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올 거야."
그건 단순한 학위 논문이 아니었다.
한 줄 한 줄이 간절한 기도였고, 못난 엄마가 아이들에게 보내는 속죄의 편지와도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달 반만에 아이들이 퇴원해 집으로 왔지만, 케이스 스터디 쓰기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작디작은 몸에는 산소 포화도를 체크하는 센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모유 수유는 꿈도 못 꿀 상황이라 특수 분유를 먹여야 했는데, 먹일 때마다 산소 포화도 수치가 떨어져 경고음이 '삐-' 하고 울렸다.
그 날카로운 기계음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매일 밤 아이를 안고 울었다. 하지만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엄마로서,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 이걸 끝내야 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면서 내가 과연 나중에 복학해서 졸업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는 엄마로서도, 전문가로서도 영영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 논문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자, 엄마로서의 첫 번째 증명이야."
나는 독해지기로 했다. 산소 포화도 기계를 확인하며 특수 분유를 먹였다. 밤새 아이가 보채면 등에 업고 서서, 케이스 스터디를 위한 사례들을 글로 풀어냈다.
케이스 스터디는 현장에 나가지 못해 선택한 차선책이었지만, 내가 직접 겪은 일이기에 글에는 생생한 현장감과 확신이 실렸다.
그렇게 완성한 케이스로 심사장에 섰다. 그리고 졸업식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우수 졸업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믿기지 않았다. 현장 조사를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케이스 스터디'가, 오히려 이론보다 더 가치 있는 살아있는 연구로 인정받은 것이다. 스스로를 원망하며 울었던 밤들이 '최우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내게 돌아왔다.
그때 깨달았다. 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순간이, 사실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새로운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는 것을.
극한의 상황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시킨다.
인큐베이터와 산소 호흡기 사이에서 보낸 그 시간은 내 인생의 '멈춤'이 아니었다.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바꾸고, 엄마로서 생명을 지켜내는 법을 배우며, 전문가로서 내 경험을 이론으로 증명해 낸 가장 뜨거운 '몰입'의 시간이었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과정을 통과해 냈기에, 이제 어떤 일이 닥쳐도 두렵지 않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며 10개월을 보냈을 무렵, 회사에서 호출이 왔다. "래비님, 이제 그만 복귀하시죠. 할 일이 많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그리고 진짜 내공을 가진 '조직문화 전문가'가 되어 다시 회사의 문을 열었다. 이제 내 앞에는 또 다른 차원의,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래비가 제안하는 커리어 블렌딩 3단계 질문]
STEP 1. [Pivoting] 방법이 막혔을 때, 목적까지 포기하는가?
-현장 조사가 불가능할 때 '졸업'을 포기하는 대신 '케이스 스터디'라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상황이 안 되면 목표를 바꾸지 말고, 도구(수단)를 바꿔라.
STEP 2. [Reframing] 자책을 책임으로 바꿨는가?
-"나 때문에"라는 자책감에 빠져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 미안한 마음을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해내야 한다"는 독한 책임감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STEP 3. [Resilience]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는가?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인간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상황 탓을 하며 미루고 있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배수진을 쳐보라. 그 절박함이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8화 예고]
쌍둥이 엄마로 회사에 복귀한 래비. 하지만 환영의 박수도 잠시, "애 엄마가 예전처럼 독하게 일할 수 있겠어?"라는 보이지 않는 편견과 마주한다. 워킹맘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달고, 일과 가정의 줄다리기 속에서 조직문화를 넘어 '여성 리더십'이라는 새로운 파도에 올라타는 래비의 고군분투 복귀전이 펼쳐진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사람과 조직의 성장을 고민하는 코치이자 교육·문화 담당자입니다. 20년의 치열한 실무 경험과 워킹맘의 일상을 재료 삼아, 지나온 모든 순간이 어떻게 현재의 나로 '블렌딩'되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담아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