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의 기억, 그때 나는 나를 이겼다
지금도 '산'하면 15년 전 회사 팀워크숍으로 갔던 설악산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 팀은 무려 1년을 준비했다. 각자 주말마다 작은 산을 오르며 체력을 다졌고 함께 회사 계단을 오르내렸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새벽에 한계령에서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됐다.
초반엔 웃으며 사진을 찍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허벅지는 천근만근, 머릿속에는 조직장에 대한 원망과 함께 '왜 사서 고생하지?'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정상까지 가야 한다는 목표보다 지금의 고통을 그만 멈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은 것들이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 장만했던 등산복이 땀에 흠뻑 젖은 느낌, 얼굴에 엉긴 소금기, 그리고 대청봉 정상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날이 내 인생에서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다는 사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마음속에서 되뇌곤 한다.
"그때 내가 설악산을 올랐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겠지."
◆ 상처는 흉터가 아닌, 나이테가 된다
삶도 산을 오르는 일과 닮았다. 정상에 오르기 전, 누구나 몇 번은 주저앉고 싶어진다.
직장에서의 승진 실패, 관계의 균열,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럴 때마다 내 마음 어딘가에 멍이 생긴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상처는 예측 불가능하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시도했고 버텼고 살아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상처에 갇혀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딛고 한층 더 단단해질 것인가.
이 전환의 중심에는 회복탄력성이 있다.
◆ 고난의 계절이 나이테를 만든다
나무의 나이테는 따뜻한 봄날에만 생기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바람, 메마른 흙의 시간을 견디며 만들어진다.
산 정상 부근에서 본 이름 모를 나무가 생각난다. 몸통은 심하게 휘어 있었고, 껍질엔 깊은 상처가 많았다.
하지만 그 상처와 휘어짐은 수십 년을 버텨낸 증거다. 우리의 상처도 나를 깎아내리는 흉터가 아니라, 내면을 한 겹 더 단단하게 만드는 심리적 나이테다.
한 해를 지나 하나의 나이테가 만들어지듯이, 우리도 상처와 치유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성장한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면 그것을 숨기거나 지우려 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성장의 첫걸음이라 말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묻는다.
"지금 이 고난이 훗날의 나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까?"
◆ 상처는 끝이 아닌, 다음 장의 시작
회복탄력성이란 상처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이전보다 더 단단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상처들이 결국 나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아픔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굳은 의지와 땀이 함께 있다.
설악산에서의 추억은 정상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진짜 의미는 그때 흘린 땀과 포기하지 않았던 그 순간에 있다.
오늘도 나는 묻는다.
"이번 시련은 또 어떤 나이테를 남기게 될까."
가장 가파른 오르막 뒤에는 언제나 가장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어릴 적 아이디 ‘빨래비누’에서 출발해, 사람과 조직, 관계를 조용히 탐구하는 코치이자 조직문화 전문가입니다. 20년의 실무 경험과 워킹맘으로서의 삶을 바탕으로, 상처받은 마음의 회복을 돕는 작은 연구실을 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