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선거에서 ‘거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심리적·사회적·정치적 의미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선거유세에 나선 후보자와 유권자의 거리는 최소한 360cm 이상이어야 한다.”
“선거는 결국 공간과 거리의 예술이다."
"얼마나 멀리, 얼마나 가까이에서,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도 달라진다.”
360cm의 물리적 거리두기가 돈 안 드는, 돈 못 쓰는 선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공간과 거리의 재해석은 금권·관권의 개입을 줄이고, 정책·공약 중심의 건강한 선거문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선거와 공간’, ‘선거와 거리’라는 키워드로 국내외 연구와 현장 팩트, 그리고 흥미로운 사례들을 짚어본다.
360cm 거리 유지하면 선거문화가 바뀐다고?
후보자와 유권자의 거리를 "최소 360cm(3.6m) 이상"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식적인 선거법, 학술 논문, 혹은 국제적 선거 가이드라인에서 직접적으로 명시된 수치는 아니다. 이 파격적인 주장은 돈 안 드는, 돈 못 쓰는 선거 즉, 금권·관권의 개입을 차단하고, 정책과 메시지 중심의 공정한 선거를 실현하자는 철학적 선언이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선진국의 선거법에서는 투표소 주변에서의 선거운동(선거운동 금지구역, electioneering distance)과 관련해 투표소 입구로부터 30m(100피트), 60m(200피트), 90m(300피트) 등 다양한 거리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투표소 내·외에서의 선거운동 제한거리일 뿐, 후보자와 유권자 간 직접 접촉 시의 ‘최소 거리’로서 360cm를 규정한 사례는 없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싱가포르 등 일부 국가는 유세팀 간 1m 거리 유지, 5인 이하 집단 유세 및 악수 금지,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차원의 거리두기 지침을 적용했으나, '3.6m'라는 수치는 공식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학술적으로는 후보자와 유권자의 ‘지리적 거리’가 투표 행태에 미치는 영향(예: 지역구 내 후보 거주지와 유권자 간 거리)이 연구된 바 있으나, 물리적 유세 거리로서 360cm를 제시한 논문은 없다.
하지만 '360cm'라는 수치의 주장은 공식적인 법적 근거나 국제적 표준, 학술 논문에 근거한 수치가 아니라,
특정 목적(예: 금권·관권 선거 방지, 접촉 최소화 등)을 위해 방역 등에서 파생된 '강화된 거리두기' 개념을 선거에 적용한 일종의 아이디어성 주장이다.

선거와 거리 : 심리적·물리적 거리의 이중주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후보자와 유권자 간 ‘사회적 거리두기’는 선거유세의 풍경을 바꿨다. 악수와 사진 촬영, 밀착형 유세는 줄고, 마스크와 장갑, 거리두기가 일상화됐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거리두기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 표가 급하니 다가서는 유권자들을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현장 취재진의 평가는,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의 ‘공간적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거리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이념 거리’라는 개념도 있다. 연구에 따르면,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의 이념적 거리를 실제보다 가깝게 느끼는 ‘동조화 효과’를 보인다. 반대로 반대 진영 후보와의 거리는 실제보다 멀게 느끼는 ‘대조화 효과’도 존재한다. 특히 보수 정당 지지자의 동조화 효과가 진보 정당 지지자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는 실증 결과도 있다.
또한, 해석수준이론에 따르면 시간적·사회적 거리감이 메시지 수용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시간적으로 먼 미래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가까운 이슈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공간심리학 한 전문가는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사람과는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도 불편해 하지 않지만, 싫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내재돼 있다"면서 "유세기간에 아무래도 신체접촉이나 가까운 물리적 거리를 경험하면 그 후보를 선호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공간이 바꾸는 선거 : 유세, 투표소, 선거구의 과학
과거 대규모 군중집회와 확성기, 현수막, 명함 돌리기가 주류였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은 이후 기존의 ‘밀착 유세’에서 ‘거리두기 유세’로, 공간의 민주화가 선거의 본질을 바꿔가고 있다. 이제는 ‘얼마나 가까이’가 아니라,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한다.
최근엔 소음공해와 역효과 논란, SNS와 미디어 중심의 비대면 유세가 늘고 있다. 실제로 “길거리 유세가 시끄럽다”, “역효과 아니냐”는 비판이 많지만, 여전히 후보자들은 대면 유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직접 만남’이 주는 심리적 효과와 현장 표심 때문이다.
현행법상 유세 소음 기준치는 127데시벨로, 이는 비행기 이착륙 소음(95데시벨)보다 훨씬 크다. 청각 장애 위험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상인들은 “손님과 대화가 안 된다”고 호소하지만, 기준치 초과로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는 거의 없다. 공간의 쾌적함과 선거운동의 자유,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특히 정치지리학 연구는 ‘투표소까지의 거리’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혀왔다.
서울 강남·서초구 사례에서 사전투표소간 평균 거리는 2.9~3.4km, 최단거리는 500m, 일부 지역은 2km 이상 차이가 났다. 투표소가 멀수록 투표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는 단순한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의 접근성과 참여율, 나아가 민주주의의 질과 직결된다.
선거구 획정 역시 공간적 조밀성, 인구 등가성 등 과학적 기준이 중요하다. 정치적 의도나 임의적 개입이 아닌, 데이터 기반의 공간 최적화 모델이 공정성을 높인다는 연구도 있다.
수도권 총선 결과를 공간통계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최근 선거에서는 인접 선거구간 정치성향의 공간적 유사성이 약화되고, 동일 선거구 내 유권자 결집이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지역주의 약화와 이슈 중심 투표의 확산을 의미한다.
거리두기, 돈 안 드는 선거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후보자가 유권자와 가까이서 접촉할수록, 금품·향응 제공 등 불법 선거운동의 유혹이 커진다. 반대로 일정 거리를 두면 ‘돈 안 드는 선거’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공직선거법은 금품 제공, 향응성 모임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SNS를 통한 선거운동이 확산되면서, 공간적 제약 없이 정책·공약 중심의 소통이 강화되고 있다. 이는 ‘거리의 민주화’로 볼 수 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악취 등 혐오 자극이 있는 공간에서 유권자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선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전단에 악취를 입히는 극단적 선거전도 있었다. 공포감을 자극하는 공간(예: 테러, 경제위기) 역시 보수적 투표 성향을 강화한다.
미래 선거의 새로운 키워드로 '거리의 재발견', '공간의 재정의'가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