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죠. 참으로 무심하고 또 무례한 말 같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것이 인간심리기도 합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란 건 우리 거슬러 올라가보면 초등학교때부터 경험했죠.
“오늘 몇일이지? 15일인가~ 야, 15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결코 잊혀지지 않는 수학쌤 목소리…그저 내가 15번이 아니란 사실에 크게 기뻐하지 않았던 자 있으면 나와보십시오.
나(만) 아니면 되고, 내(가) 안걸리길 바랬던 적은 아마 살아오며 수없이 많을 껍니다.
정말 비극적 뉴스를 접할 때도 맨 먼저 떠올리는 건 슬픔이나 애도 보단 우리 가족 생사여부 및 피해상황 정도니까요.
그게 인간이고 그게 사람 마음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쇼펜하우어 인생수업>(쇼펜하우어 저 / 김지민 엮음, 주식회사 하이스트그로우) 그 41 번째 주제는 ‘나보다 슬픈 자를 보는 일이 나를 웃게 한다’ 입니다.
간만에 참으로 쇼펜하우어 형님다운(?) 주제가 돌출됐습니다.
책은 말합니다. ‘행복과 만족은 소극적으로 느끼며 슬픔과 괴로움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벌처럼 내려진 재앙’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타인의 불행과 비극을 지켜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물론 오늘날처럼 도덕 개념이 높아진 지금, 이는 올바른 방향은 아니기에 불행의 당사자를 타인이 아닌 과거의 나 내지 미래의 자신으로 설정하라는 제안도 덧붙입니다.
소위 감정의 순화로 풀이되는 ’카타르시스‘ 저 역시 이 감정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이를 바라보고, 나도 슬프지만 나보다 훨씬 슬픈 그들을 지켜보면서 잉여의 위로와 안부를 건네며 나를 다독이고 타이르며 어느새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어떻게 들리시나요? 정말 혐오스러운가요? 아니면 이기적이지만 당연하다고 여기실까요?
비교하지 않는 마음상태인 ‘무심’이 수도자는 물론 우리가 지녀야할 지향적 가치지만 우리는 하루에 수없이 제3자는 물론 스스로도 비교에 비교라는 채찍질을 가합니다.
그 존재가 바로 인간이고. 그 실체가 바로 우리일듯 합니다.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라 여기지 마시고, 더 깊은 수렁과 더 험한 골짜기에 놓여진 주변인 그리고 과거(미래)의 나를 살피면서 카타르시스를 통해 한층 더 탄탄해질 우리를 그려봤으면 합니다…(to be continued)
*칼럼니스트 올림은 건설-자동차-엔터테인먼트&미디어-식음료-화학/소재를 거쳐 아이티 기업에 종사 후 잠시 다음 길을 모색하며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