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임대주택은 범죄자가 사는 곳도, 공동체를 해치는 집단도 아니다. 그럼에도 강남권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는 임대 세대를 ‘좌표 찍기’로 특정하고, 비상계단까지 잘라내는 노골적인 선긋기가 반복되면서 ‘소셜믹스’ 정책이 현장에서 무력화되고 있다.
“옆집 임대래” 단톡방에서 시작되는 낙인
2026년 1월 입주를 앞둔 서울 송파구 잠실 르엘(총 1865가구)에서는 최근 입주민 단체 채팅방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동·호수 배치표’가 빠르게 공유됐다. 배치표에는 조합원·분양·임대·보류지가 색깔로 구분돼 있어 198가구(전체의 약 10.6%)인 임대세대 위치를 사실상 한눈에 특정할 수 있었다.
배치표가 돌자 일부 커뮤니티에는 “로열층도 임대에 넘어간다”, “한강변 단지는 한강뷰도 공공에 내줘야 한다”, “임대세대 윗집이나 옆 세대를 조심하라”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전용 59㎡ 공공임대 ‘미리내집’의 전세보증금이 8억4240만원으로 주변 시세 대비 약 30% 저렴하다지만, 웬만한 중산층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금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임대 세대를 ‘민도 낮은 집단’으로 취급하는 시선은 편견의 소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벽 세우고 계단 막고’…물리적 차별의 실체
서울 마포구 서교동 주상복합 메세나폴리스는 임대 세대가 4~10층, 분양 세대가 11층 이상으로 나뉘어 배치된 대표적 소셜믹스 단지다. 그런데 이 단지 103동 비상계단은 10층에서 1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어 아래층 임대세대 주민이 화재 시 위층으로 대피할 수 없는 구조로 지적됐다. 소방시설법은 공동주택 비상계단을 상·하층이 연속되게 설치하도록 규정하지만, 이 단지는 임대·분양 동선을 분리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계층 분리’형 구조를 만들어 논란을 빚었다.
서울시의 한 조사에서 시민들은 혼합주택단지 차별 중 가장 심각한 문제로 “출입문·계단 분리 운영 등 임대세대를 구분 짓는 행태”(32.2%)를 꼽았다. 이어 “관리사무소·입주민의 차별적 언행·시선”(30.7%), “부대시설 이용 제한”(13.1%) 등이 뒤를 이었는데, 사실상 물리적 장벽과 정서적 장벽이 결합해 임대 세대를 ‘보이지 않는 빈곤 구역’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평가다.
‘소셜믹스 5년’ 현실에선 역행
서울시는 2021년부터 재건축·재개발 단지에서 임대주택을 동·층별로 분산 배치하는 ‘소셜믹스’ 가이드라인을 도입해, 과거처럼 임대동을 따로 두거나 커뮤니티 시설 이용을 금지하는 관행을 막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025년 한 경제지 조사에서 “저 집은 임대아파트”라는 낙인과 함께 임대 세대를 특정·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서울시 혼합단지 연구에서도 공공임대 입주민과 분양 입주자 간 갈등 사례가 누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겨레>가 2020년 서울 주요 소셜믹스 단지 임대세대 119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임차인으로서 차별을 느끼거나 경험한 적 있다”는 응답이 77.3%에 달했고, “동등 대우를 받는다”는 응답은 14.3%에 그쳤다. 차별 유형은 “임대세대라는 사실을 이유로 한 모욕적 언행”, “커뮤니티 시설 이용 제한”,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의견 배제” 등이 복수로 지적됐다.
한강뷰도 ‘임대 반발’…재건축 현장의 진실
잠실주공5단지는 한강 조망권을 가진 동·호수에 공공임대가 배치되자 “조합원 한강뷰를 뺏겼다”며 반발이 거셌고, 서울시 정비사업 통합심의위원회는 “소셜믹스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저층 비선호 동에 임대를 몰아 넣으려던 초기 안에 제동을 걸었다.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에서도 서울시에 기부채납되는 전용 59㎡ 16가구가 한강변 라인에 배치되자 조합 측이 “전 조합원 한강뷰” 공약이 무너졌다며 반발했고, 결국 조합장이 해임되기까지 했다. 고가 단지일수록 ‘생활 수준’과 ‘커뮤니티 정체성’을 이유로 임대 세대 유입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정비업계의 공통된 진단이다.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임대 낙인
임대·공공주택에 대한 낙인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호주 멜버른의 한 혼합단지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민간 소유 거주자가 공공주택 거주자에 대해 범죄·무질서와 연결된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을수록 ‘같은 단지에 살기 싫다’는 응답이 높았고, 사적 거주자·고령층·저소득층에서 낙인 수준이 특히 컸다.
영국과 뉴질랜드 등에서도 사회주택 거주자가 주변 주민의 시선과 차별 때문에 공용 편의시설 이용을 포기하거나 이웃과의 접촉을 끊는 사례가 보고되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주거형태에 따른 구조적 낙인”으로 규정한다.
최근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실린 연구는 공공임대가 흩어져 배치된 ‘스캐터드 사이트’ 방식이 단지형 공공주택이나 형식적인 소셜믹스 단지보다 거주자의 낙인 경험을 유의미하게 줄인다고 보고했다. 단순히 평면 배치를 섞어놓는 것만으로는 편견을 지우기 어렵고, 제도·운영 차원에서 임대 거주자와의 실제 접촉과 상호작용을 늘려야 한다는 의미다.
“임대가 무슨 잘못인가”
전문가들은 임대 세대에 대한 낙인이 결국 도시 전체의 위험요인이 된다고 경고한다. 서울시 혼합주택 갈등 실태 연구는 임대 세대에 대한 배제가 심한 단지일수록 주민 간 신뢰와 공동체 만족도가 낮고, 분쟁과 민원이 더 자주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공공임대 거주자를 ‘잠재 범죄자’나 ‘무임승차자’로 취급하면, 이들이 커뮤니티와 공공 자원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결국 사회적 비용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한 주거복지 연구는 주거 차별을 줄이고 임대·분양 간 접촉을 늘릴수록 건강과 사회적 통합 수준이 개선된다고 보고하며, 주거형태에 따른 차별을 완화하는 것이 공중보건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임대주택은 도시 필수 인프라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한 타인’이 아니라 같은 세금·공과금을 내며 함께 도시를 지탱하는 시민”이라며 “‘옆집 임대’라는 말이 좌표가 아니라, 함께 사는 이웃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