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나면 주말이고, 차주 조금 버티면 연휴고 그러고 나면 연말이고 또 한 해가 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나만의 루틴 속에 나의 행복과 평정심을 찾고 그러면서 또 준비하고 도모하면 좋을꺼라고 현자들은 말합니다. 한마디로 멀리 보지도 말고, 예측하지도 말고, 깊게 발담그지 말라는 ’근시안‘적 사고가 필수란 말이었습니다. 보통은 훗날을 내다보고, 차기를 준비하며, 원대한 포부를 가지라고 할텐데 전 왜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의구심이 드는 여러분, 이 기조를 한번 따라보시면 어떨까요… 그러고나니 아르키데메스 ’유레카‘는 아니지만 딱하고 떠오른 생각! ’맞아~ 고민해도 답이 없었고, 걱정해도 안풀렸으며, 노력해도 안되던 때가 있었지… 백날 훗날을 그려봐야 당장 한 치 앞을 모르는데, 뭔 의미가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절로 무거웠던 머리가 끄덕여 졌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겠지만, 힘들껍니다. 멀리 보는 사람이 많이 담겠지만, 눈이 아플껍니다. 희망만을 꿈꾸면 절망이 왔을 때 무너질껍니다. 맞습니다… 그럴껍니다.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수 이예린의 명곡 <늘 지금처럼>처럼 ’유지의 미학'을 실천하고 다짐하면
‘없는 마음 갖기’란 일명 ‘무심’을 위한 기본인 ‘비움’을 생각해 본다면 역으로 뭔가 차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쌓여 있다는 거겠죠. 아마도 스트레스, 근심, 번뇌, 걱정 등등… 뭐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 일주일 중 특정요일을 정해 재활용 분리수거 하듯 규칙적으로 할 순 없겠지만, 무심을 유지하기 위해선 비움에도 전략이 필요합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에 버리시겠습니까? 잔도 비우면 채우고, 허기도 느끼면 먹거리를 채워야 하듯 늘 일정한 수준으로 평상심에 가까운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소위 ‘카타르시스’ 전략이 필요합니다. 큰숨, 한숨, 명상 등은 이미 다들 하고 있는 것일테고 오늘은 좀 창피하지만, 때론 부끄럽겠지만 확실한 방법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혼자만의 공간과 소음이 새어 나가지 않을 곳이 필수긴 한데 바로 ‘대성통곡’ 입니다. 물론 대성통곡이라 쓰고 크게 노래하기(소리지르기)라고 읽고 싶습니다. 순간의 분출로 희열을 맛볼 수 있으며, 내적으로 축적된 응분의 덩어리는 조금이나마 고성방가로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눈물, 콧물 마저 적당한(?) 양으로 흘려준다면 감정의 정화와 함께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의 배출로 조금
최근 우연히 tv에서 예전 법정 스님의 다큐멘터리를 접했습니다. 이제 열반하셨지만 정말 그 명작을 보고 있노라니 숙연해 지더라구요. '그렇고 그런 뻔하디 뻔한 제작물'이지 않을까란 편견은 시청 시작과 동시에 이내 사라졌으며, 그 분의 발자취와 소중한 정신에 저도 모르게 머리 숙여졌습니다. 물론 출가하며 속세의 가족도 뒤로 한 채 홀연히 삭발하던 모습은 인간적 관점에선 참 많이 아쉽고, 실망스러웠으며 저게 뭘까라고 잠깐 반문키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남기신 ‘무소유’ 정신은 정말 후세에도 길이 전해질 영적인 heritage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무소유란 무엇일까요? 그저 내가 갖고 머무는 공간에 뭔가로 채우지 않고 빈 상태를 유지하며 없는 마음가짐을 지속하는 걸 말하는 걸까요? 단지 갖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버리는, 애시당초 소유하지 않는,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도 물리적 관점에서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무소유란 늘 비우려고 노력하고, 뭔가 탐하려 애쓰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에서 욕구를 버리고 세상 이치에 발맞춰 오버하지 않으며 지내는 것이란 아주 지극히 평범한
그냥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안주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아주 잠깐 그리고 그 찰나는 잘한 것 같고, 나아가 행복감도 뿜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처한 현실에 그대로 직면할테고~ 날라오는 카드값, 각종 세금과 공과금 그리고 생활비 등 각종 청구서 독촉은 물론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한 대면활동과 모임 참석에도 제약이 따를 것이며 조금 더 지나면~ 어휴…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가끔 이상을 꿈꿉니다. 이 자체가 당연히 나쁘진 않죠. 행여나 ‘현재 감옥’에만 갇혀 밝은 미래와 달라진 훗날을 그려볼 수 없다면 이 또한 큰 재앙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ideal이라 불리우는 ‘이상’적 측면에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균형감각을 상실할 수 있고, 그간 지켜왔던 안정적인 모든 것을 삽시간에 날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심론자들도 ’이상‘ 보단 ‘이성’을 우선순위에 놓고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참으로 우스운게 생각하기에 따라 힘이 쭈욱 빠지기도 하고, 자신감이 뿅뿅 샘솟기도 한답니다. 딱 한 끗 차이로 말이죠. 힘든 것 알고 있습니다! 더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호흡을 길~~~~게 하고, 가슴을 쫘~~~~~악 펼 순 없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에 저는 ‘그래도 피하는 건 별로지 않을까요?’ 그리고 ‘되갚아주고 싶기도 하구요.’라고 고요속 외쳐봅니다. 잠깐, 아주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이게 과연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말이죠. 정답은 아시죠? 없습니다가 정답이죠! 그래서 늘 강조하고 있는 ‘없는 마음 갖기’인 ‘무심’을 외치고 있는 것이구요.. 누군가 때문에 상처 받고 계신가요? 뭣 때문에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한가요? 앙갚음을 꿈꾸고 계신건 아닐까요? 우리는 ‘무심론자‘ 입니다. 뾰족한 해결책도 좋지만, 물 흐르는대로 & 순리대로 & 마음 가는대로 내 몸과 마음을 맡기고 머리를 비우는 그런 존재! ‘아하, 피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구나~ 굳이 피할 수 있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피해야겠구나~ 피할 수 없는 경우라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하는구나~’ 피하십시오! 피하는 것이 후퇴나 창피함이 아닌 오히려 승리하는 것입니다. 각자 피할 수 있는 마음 속 한 켠과 물리적 공간을 꼭 마련하십시오. 피하기만 하면 일단은 성공입니다. 다시금 말씀 올리지만 무심 자체가 해법은 아닙니다. 다만 무심은 우리를 평온속에서 평상심
“자갸~ 여기엔 모 놓을까? 안마의자 어때?” 집 이사 한다고 결심하면 어디에 무엇을 채울 지 우선 고민합니다. 요즘 웬만한 경우 포장이사를 이용하지만 그 첫 번째 관문은 다름 아닌 스티커를 붙여 놓는 거죠. 어디에? 바로 버릴 물건에… 그렇습니다. 채우기 위한 첫번째 과정은 ‘비움’이고, 축적되고 쌓인 경우 다시 담으려면 바로 버려야(비워야) 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뭐 할지, 뭐 살지, 뭐 먹을지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쉴 지, 뭐 치울지, 뭘 안먹을지를 생각하라구요. 그 말을 듣고 한 30초 지났을까요~ 머리를 둔기로 맞은 딱 그런 느낌이 들면서 블랙이었던 머릿속이 화이트가 되는 진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실, 책장, 식탁을 보니 쓸데없이 보이는 잡기들이 눈에 띄었으며 당장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습니다. 비우는 기술의 마음가짐인 ‘무심’ 점점 무심에 다가서게 됩니다. 대장내시경 전날 고통속에 약을 삼켜가며 숙변과 잔변을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그 순간이 바로 무심이었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울 때 비로소 마음 속 전체가 꽉 찰 것입니다. 풍요 속 빈곤이 아닌 빈곤 속 풍요! 어찌 보면 ‘무소유’ 같고, 어
“again and (a)gain and (a)gain…” 예전 모 남성 아이돌이 유행시킨 히트곡 중 한소절입니다. 고민하지 말자, 해봐야 당장은 답없다.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무한반복일테니. 검토 자체는 좋고 복기도 좋은데 다 지난일. 알고 있습니다. 잊어야 함을 그리고 되새김질 자체가 무의미 그 자체임을 말이죠. 차라리 낮잠 한 두 시간 자는 것보다 못한 일이란걸 말이죠. 그런데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조건 반사적으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나고, 또 한발 더 들어가고, 나중엔 그 생각만 하고, 운전하면서도 계속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심지어 아주 차분하게 마치 명상의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그 사고의 나열고리를 바통터치 이어달리기처럼 다른 후회의 소재를 얹어가며 연결시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로 내가 말이죠. 이번 챕터에선 생각 자체에 대한 리셋 보다 그저 쉬라고 말씀 올립니다. ‘그저’라 함은 이유 없이를 말하며 & ’쉬십시오‘라 함은 let it be를 일컫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짜파게티를 드시든 짜짜로니를 흡입하든 그냥 즐기십시오. 집앞 공원도 좋고 산도 좋고 도심이라 개울은 없겠으나 벤치도 좋고 그냥 시간은 흘려보내
화가 날때 속으로 삭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분들은 갖가지 의성어는 물론 의태어도 섞어가며 분출하곤 합니다. 왜? 그래야 풀리고, 시원하고, 답답함이 해소됐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고, 화를 낸 상대방과 더 안좋아 질 수도 있습니다. 그저 즉각의 분풀이가 주는 찰나의 시원함이란 잠시 착각성 쾌감일 것입니다. ‘무심’을 장착하고 늘상 ‘무심’을 외치며 매번 마인드셋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중인 동지 여러분, 눈물, 콧물, 고성처럼 쏟아냄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있겠지만 아끼고, 참고, 줄이면서 얻는 교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바로 ‘말’ 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 연륜이 깊어질수록 반대로 이 ‘말’을 아껴서 손해날 것은 없습니다. 감사한 말, 고마운 말, 좋은 말도 있겠으나, 길게 하다보면 그 진위라는 본심 대신 본말이 전도 되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나중엔 변명을 해야할 경우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보자’란 표어처럼 ‘자나깨나 말조심, 뱉기 전에 하지말자’라고 되새겨 보면 어떨는지요. 입술을 포개고, 혀놀림을 중지한 채 하늘을 한번 바라봅니다. 큰 숨 대신 작은 숨도 괜찮구요. 내 안의 나에게 내 속의 나
“run~! 포레스트, run~!! 조그마한 공간만 있다면 달리자." 웬만한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리며 벅찬 감동을 한 번 쯤은 느꼈던 영화, 바로 <포레스트 검프> 입니다. 주인공(톰행크스)의 좌충우돌 스토리와 정상이 아닌 상태에도 불구, 끝내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리며 막판 감흥을 안겨줬던 명작이지요. ‘무심’ 리마인드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순간 망각하고, 잊어 버린 채 다시 옛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고 또 번잡한 마음을 애써 짓누르는 사고를 무한반복하다 보면 다시 피폐해 질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고민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미리 걱정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또 대다수의 고민은 이미 발생해서 엎지러진 물인데 그때 왜그랬을까란 후회막급으로 밀려오는 어쩔 수 업는 과거에 집착하며 안타까워 하는 경우 입니다. 왜 이리 강조하는 지 아시겠죠? 절대~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 커녕 해가 될 뿐이죠. 걷기도 조금은 도움을 주고 리프레쉬 효과가 있긴 하나, 그래도 런닝머신에 위에 올라가 가파름에 가까운 호흡으로 달리다보면 땀도 나고 또 이런저런 생각이 사라지고 우리 건강에도 좋고 마치고 샤워 한 번 때리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 없죠. 런닝머신이
“혹시 이거 알아?” “아~ 뭐더라…어떻게 하는거지?” 일반적 의문문과 달리 우리는 답답하거나 모를 때, 정확히는 (알지만) 외면하고 싶고 / (알듯한데) 거부하고 싶을 때에도 이렇게 되묻곤 합니다. 또한,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라고도. 그렇습니다. 사실 잘 읽어보면 (잘) 모르겠어요지 모르겠어요가 아니죠. 퀴즈나 문제가 아닌 해결해야 할 실마리는 선생님도 부모님도 아닌 제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마련입니다. 다만 인정하기 싫고, 실행하기 어렵고, 결정하기 망설여지고, 마음먹기까지 주저함이 발목을 잡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일에 있어선 어려운 뉘앙스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치~ 그렇지~ 맞지~”라고 동조해 줍니다. 그게 사회생활이고 그게 미덕이니까요. 하지만 이내 그 위안은 안위로 승화되지 못하고 다시 생각의 소용돌이에 다다르며, 도돌이표처럼 원점으로 회귀합니다. 그냥 간만에 유의미라 쓰고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거죠. 좋았어요라고 쓰고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자리를 가진거죠. 씁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은 필수고 그래서 힘들죠. 훗날 혼자가 될 상황이 두려우신가요? 친구가 필요하신가요? 말동무가 있어야 한다구요? 정답은 ‘내’가 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