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 살고 봐야지~ 다 소용없어.”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을텐데 절대적으로 동의하실꺼라고 생각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저 문장에 생략된 공통의 주어가 내포돼 있는데 바로 ’나‘ 입니다. ( ”(내가) 먼저 살고 봐야지~ 다 소용없어“ ) 각설하고) 좋든 싫든 결정을 해야만 하는 순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망설이게 되는데 가장 첫 번째로 작용하는 존재가 바로 ’가족‘ 입니다. 심지어 (나)는 잘못돼도 무방한데(상관 없는데) 가족이 잘못되면 큰 일이라고 여기는거죠 (이는 거의 본능적 사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 누가 뭐라고도 안했는데 / 누가 부추긴 적도 없지만… (내)가 (나)에게 (내)안으로 외칩니다 (”가족 생각해! 가족부터 챙겨!!“라구요) 하지만 여러분! 이기적이고 현실적으로 너무 치열하게 들릴 수 있지만 ’무심‘을 장착하기 위해선 ’내‘가 1순위여야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며, ’내‘가 편안해야만 합니다. (내)가 힘든데 다 무슨 소용이고, (내)가 지쳐 쓰러지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어렵습니다. 이 거룩한 정신 ‘무심’ 이것 저것 고려하고, 챙기고, 살피다 보면 사실 ‘무심’ 장착은 요원해
활기차게 새벽에 일어나 힘찬 런닝으로 아침을 열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이 루틴을 부담으로 여깁니다.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손들고 프로젝트에 가담하고 그랬던 친구들이 점점 의기소침해 집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것, 좋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기 싫거나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즐기던 것들이 점점 의무감으로 그리고 압박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무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그저 익숙해져 지겹고 흥미를 잃은 ‘매너리즘’이라고 보기엔 다른 상황이며, 지칠대로 지쳐 궤도를 벗어나기 직전의 심신상태인 ‘번아웃’과도 다릅니다. ‘무심’이란 이런 심적 고통과 상황 역시 즐길 수 있는 여유이며, 한발 더 내딛기 위한 잠시 ‘멈춤’이라 볼 수 있지요. 그래서 그저 참고 견디거나, 시간을 때우거나, 무슨 요행을 바란다는 것과 확연히 다르며, 그렇기에 ‘무심’은 기존과는 다른 정신임을 강조 드립니다. 일부러가 아닌 자연스럽게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의미를 부여하고 개선시키려는 작은 마음가짐이 바로 ‘무심’ 입니다. 도인이냐구요? 신선이냐구요? 아닙니다! 40대 후반의 미생이며 이런 꼴 저런 꼴 다
뭐든지 꼭 가로막고,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들이 있습니다. “아~ 딱 이것만 없으면 좋겠는데” “다 좋은데 저 사람 때문에 싫어요” “좋아 보이긴 하는데 저건 어찌 안될까?” 이것, 저 사람, 저것 이외 기타 등등 칭해지는 모든게 바로 방해꾼들이죠. ‘무심’도 잘 장착되면 별다른 처방이나 도움 없이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잘 지낼 수 있을텐데 늘상 훼방하는 것들이 예고없이 불~~~~쑥 튀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참 지난 과거의 사고 / 생각해봐야 득될 것 없는 인간 군상 /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상황들인데 그걸 굳이 끄집어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고 이것들은 쓸데없고 무의미함 그 자체인데 실상은 (주의를 기울이고, 더욱 신경을 쓰는 등)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 합니다. 이래서 무심도 훈련이 필요하고, 뭐든 기대하거나 기대지 말고 ‘불가근 불가원’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잡념이 몰려올 때 누차 말했지만, 거기 천착하지 말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또다른 생각의 나래를 펼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심 장착을 방해하는 요소는 이 외에도 다양하겠으나, 최소한 무심이란 단어의 정의처럼 ‘무’에 집중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세월에 접어든 가수 김종찬의 히트곡, <당신도 울고 있네요>는 지금도 가끔 들어도 심금을 울리며 잠들어 있는 내안의 감수성을 자극하곤 합니다. 여러분, 가끔식 울고 싶을 때 있지 않은가요? 화를 삭이고 / 상한 기분을 가라 앉히고 / 슬픔을 잠재우고 / 기대에 못 미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한 채…. 가끔, 아주 가끔은 그냥 소리내서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그냥 삼키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행가 제목을 타이틀로 꺼내 들었습니다.) 아주 친한 업계에서 알게 된 의형제 같은 형이 말합니다. “난 예전에 정말 목놓아 울기도 했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없었고, 집도 회사도 부담스러웠거든…지나고 나니 시간이 약이었고 또 이렇게 살아지네” 라구요. 그리고 또 이어 말했습니다 “완벽하고 온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의외로 단순하게 또 풀리고 또 자연스럽게 해결되더라”고 말이죠.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한 때는 당신을 미워했지요~ 남겨진 상처가 너무…” 그렇습니다. 당신 혼자만 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 혼자만 외롭지 않습니다. 당신 혼자
예전 일입니다. 추석을 맞아 빈약한 극장가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가족들과 한국영화 한 편은 봐야겠다는 의지로 선택한 작품 <1947보스톤>. 마라톤을 주제로 한 감동어린 영화였습니다. 역량을 갖춘 마라토너는 보통 선두권에서 자기만의 보폭과 호흡을 조절하며 막판 스퍼트를 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힘을 비축하며 한 발 한 발 내딛지요. 또한, 실력은 조금 떨어지나 우승을 위한 조력자로 말그대로 pace 조절에 도움을 주는 이를 ‘페이스(pace) 메이커’라 부릅니다. 이번 작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더라구요~ 역설적인게 이들이 없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자기 혼자 판단해서 42.195km를 뛰어야 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지기 십상이며 1등은 커녕 완급조절 실패로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그만큼 평소 훈련할 때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이 중요하단 방증이겠죠? 여러분, 무심의 기본 또한 완급조절 입니다. 욱~할때 / 참기 힘든 순간 / 내려놨다고 말하고 정작 내려놓지 못한 시기 / 계속 비움을 유지해야 하나 채우지 못해 화가 나는 시간…. 그 때를 위해 평소 페이스를 조절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알면서도 / 알고서도 / 모르는 척 하며 실
이제는 십수년 전 일입니다. 당시 담당 임원께서 절 찾으시더니 소위 수명업무, 바로 윗선의 미션을 하나 주셨습니다. 웬만하면 직속 상관의 직접 오더고, 잘 해내면 저도 돋보일 것이 분명 했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must업무라 살짝 아니 많이 고민은 됐는데… 이내 제 입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버겁습니다!“ (임원 왈) ”뭐라고?“ (저는 재차 왈) ” 버.겁.습.니.다….” 그 분도 어이가 없었던지 약간 썩소를 지으셨고, 그럼에도 어쩌겠냐며 절 타이르시고 수일 후 전 소리/소문없이 베트남 출장을 나가 멋드러지게까진 아니지만 임무완수 후 돌아왔지요. 수일 지나 이 에피소드는 가볍게 알음알음 회자가 됐고 제 별명이 한때 ‘버거’였지요. 여러분, 버겁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심리적 공간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얼마일까요? 저는 일부러 국어사전이나 포털 검색을 안해봤습니다. 그저 ‘버거움’이란 세 글자가 주는 포만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고 이 단어는 굳이 정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심’을 장착하고,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바로 이 녀석(버거움)이 올 것입니다. 상세히 묘사하고 설명하긴 쉽지 않은데 가슴 한 켠이 묘하게 무겁고, 그 마음으로 불편하고
사자성어는 언제 들어도 있어 보이고 또 그 의미를 새겨보면 참으로 주옥같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네 글자의 미학이라고나 할까요. 절치부심은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다란 뜻으로 대단히 분하게 여기고 마음을 썩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와신상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분노를 다스리며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사실 중요하지만, 그 화를 스스로 못이기고 그 열에 스스로 불탈 수도 있습니다. 부심 대신 무심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매일 운동하고, 남의 것에 욕심 내지 않고, 상대와 비교하지 않은 채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이유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무심’을 깨닫고 터득하기 위해 애쓰는 당신! 여러 제안도 드렸고 말씀도 올렸지만, 무심은 명의가 특효약을 처방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별도의 비법이 있어 전수되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트레이닝과 마인드셋 다지기로 일궈지는 것입니다. of the 나, by the 나, for the 나…바로 ’나나나‘ 입니다. 그래서 이타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개인주의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기주의는 아니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무심과 가장 어울리는 말이 제법 있는데 ’시간이 약이다‘와
‘영원불멸’…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음을 말하니,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떠나 굉장히 있어 보이고 유서 깊어 보입니다. 이에 반해 순간과 찰나 등은 아주 잠깐의 시간으로, 그저 스쳐 지남인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처럼 이 역시 우리가 만들어가는 작지만 큰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 시간 이야기를 꺼내들었을까요? ‘무심’을 견지하기 위해선 딱 하나만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조직 생활을 함에 있어 순간 ‘욱’할 경우 그리고 ’화‘를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아가 ’잠깐‘ 모면하면 될 일이 의외로 많은데 우리는 그런 자리와 그런 때를 안타깝게도 지키고 있습니다. 파수꾼도 아니면서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경비대도 아니면서 계속 바라보느라고… 군대도 시정하면 되는데 고수하느라고… 있지도 않았던 스트레스를 받고, 생기지도 않을 화병을 얻고, 끝내 난관에 처합니다. 그럼 어찌하면 될까요? 잠깐 밖으로 나가고, 잠시라도 나가서 걷든지 뛰고, 생각나는 걸 그냥 생각하지 마십시오. 막상 실천해보면 의외로 쉽고,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전 건배사로 유명했던 “이멤버? 리멤버!”처럼 우리 계속 기억하자고 다짐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고 역시 거장이라 칭송되는 이유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는 놀란표 영화 중 <다크나이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무비학도입니다. 선과 악 그리고 이를 둘러싼 배트맨과 조커의 숨막히는 대결은 정말 언제봐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표방하는 ‘철학’이 담긴 이른바 ‘필로버스터’의 최고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darkness,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둠’이겠죠. ‘악’과 일맥상통하는 듯 하나 조금 다른 의미고, 밝음으로 상징되는 긍정과 낙천이 아닌 부정과 염세라고 부를 것입니다. 주변 암으로 고생하는 환우들을 보면 막상 그 부위는 수술도 잘 마쳤고 제거까지 했지만, 다른 곳으로 전이돼서 더욱 고생하는 형국을 보셨을 듯 합니다. 무심이란 자체가 마음을 비워야 함이며 차지하려는 불필요한 생각을 날려야 하는데 가끔 주변 ‘암’의 세력이 유혹하고, 동조시키고, 부추김에 따라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듣고보면 맞는 말 같고…. 약간은 동병상련의 기운이며…. 응원과 동참도 있기에…. 하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아닌 <1보 전진을 가장한 2보 후퇴>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
내가 힘든데 주변을 챙길 여유가 있을까요? 인위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일부러 누군가에게 뭔가를 서포트하려는 행동이 참됨은 아닐 것입니다. 무심은 사실 ‘이타주의’도 아니고 ‘이기주의’도 아닌 ‘개인주의’에 가깝지만, 한층 더 들여다보면 둘을 합친 ‘개타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몸에 베어있지 않다면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을텐데 아주 사소한 것도 챙기는 이들을 보면 사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무심파 입니다.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무심’안에는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정’과 함께 에로스나 아가페는 아닐지언정 교감할 수 있는 ‘사랑’을 넘어 기부라는 거창한 말은 아니지만 쉐어할 수 있는 ‘도네이션’이 담겨져 있습니다. 진짜 무정한 사람들은 자기만 챙기고 절대 주위를 살피지 않는데 그건 사회적 고립이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무심’이 아닌거죠. 바쁜 주중 어느 날 흐린 오후 한 때 움직이는 이동의 순간 대신 여유 있는 주말, 맑은 아침, 커피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하곤 합니다. 겉으론 이 세상 다가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죠. 꿈꿔봅니다.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