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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건축

[공간사회학] '슬픔·아픔의 역사' 이태원, Tolerance·openness 갖춘 다인종·다문화 공존의 공간 '재탄생'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이태원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역사적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공간이다. 현재 이태원(梨泰院)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을 정도로 파란만장함을 담고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 →효종 이후에는 '배나무가 많은 역원'이라는 뜻의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했다. 이는 당시 왜군이 주둔하며 저지른 만행과 그 후에 남은 왜군과 조선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당시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加籐淸正)'은 이태원(梨泰院)에 주둔(駐屯)한다. 주둔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대부분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겁탈(劫奪)의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 대상이었다. 불교 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린다.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됐다. 선조(宣祖 1552-1608)는 왜놈들의 피가 섞인 자식들과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異邦人)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조때도 병자호란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인들과 그 여인의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오게 된다. 이후 북벌(北伐)을 준비하던 효종(孝宗 1619-1659)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배나무가 많다는 의미로 지명을 교체하면서 현재의 명칭을 가지게 됐다.​ 공무상 지방으로 왕래할 때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고, 이 역시도 교통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물론이고 장호원, 조치원, 인덕원, 사리원, 퇴계원 등이 모두 역참이 있던 마을이었다. 이태원(梨泰院)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다. 서쪽의 홍제원(弘濟院). 동쪽의 보제원(普濟院), 남쪽의 이태원(梨泰院)과 인덕원(仁德院)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원이었다. 이태원(梨泰院)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이태원은 역사적으로 외국인 또는 이방인의 거주지, 즉 ‘이방인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 일제강점기의 일본군, 그리고 광복 후 미군이 연이어 주둔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基地村)까지 생겨났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 이후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 아파트,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한다. 그러자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태원의 어원이 이타인(異他人, 외국인)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외국인이 많은 지역이었다는 의미다. 위치는 서빙고와 영남로를 연결하는 사이에 있고, 그 사이에 험한 산이 없어서 이동하기에 좋다. 한강을 건넌 후 남산과 용산의 사잇길을 빠져나가서 남대문으로 가기에도 편하다. 조선시대부터 교통이 편하니 외국인이 몰려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이태원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공간으로 변모하며, 한국 내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로도 자리 잡았다. 단층 집단에서 벗어나 자유와 소통을 표방하는 젊은이들의 해방구로서 기능해왔다. 이 같은 다문화적 특성은 국내외 미디어와 뉴스 담론에서 이태원을 경계 공간(liminal space) 혹은 탈경계화된 다문화 공간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태원은 핼러윈 축제를 비롯한 대규모 인파 몰림으로 인해 비극적인 압사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도 기억된다. 2022년 10월 29일 승강이 좁은 골목길에서 인파가 급증해 159명이 사망하고 195명이 부상당한 사고는 한국 현대사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최대 인명피해였다. 이 사고는 과잉 인파 대비 경비 인력 부족과 치안 관리 미흡, 신속한 구조 장애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도시 공간과 안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태원의 공간사회학적 의미는 단순히 외부인과 다문화가 공존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처와 현대 사회의 위험이 교차하는 복합공간이라는 점에서 깊은 철학적·문화적 해석이 가능하다. 명칭의 변천은 역사적 폭력과 생존, 정체성에 대한 은유이며, 현재의 핫플레이스로서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관광과 소비 자본주의, 미디어에 의해 재구성된 소비 중심적 코뮤니타스(communitas)로 볼 수 있다. 동시에, 광복 이후 외세와 군사 문제로 점철된 상흔, 기지촌 여성 착취, 그리고 대형 참사의 트라우마가 내재된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 이태원은 한국 도시 공간에서 역사와 문화, 사회적 상처가 얽힌 다층적 공간으로,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생동감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다. 이 공간이 가진 이중성은 역사 이해와 공간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더욱 깊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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