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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내궁내정] “휴브리스, 네메시스” 뭐길래…항공사 기장 살해범이 훔친 비극의 언어, 그 오만한 자기정당화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부산에서 현직 항공사 기장을 살해한 전직 부기장 김동환이 검찰에 구속 기소되면서, 그가 호송 과정에서 내뱉은 “휴브리스, 네메시스! 악랄한 기득권이 한 인생을 파멸시켜도 된다는 휴브리스, 미친 네메시스,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발언이 강한 파장을 낳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기득권에 의해 파괴된 개인”이자 “신의 응징을 집행한 주체”로 위치시키려 했지만, 수사기관과 여론은 이를 철저한 계획범죄를 미화하는 오만한 자기정당화로 읽고 있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원래 ‘오만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신의 응징’을 뜻하는 비극의 개념이지만, 부산 기장 살해 사건의 피의자 김동환(49) 입에서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자기 범죄를 ‘정의의 집행’으로 포장하려는 왜곡된 레토릭으로 전도됐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범죄를 넘어 한국 사회에 축적된 피해 의식, 엘리트 혐오, 그리고 ‘응징 욕망’이 뒤섞인 집단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1. '신의 응징'을 자처한 피의자의 자기 서사 김동환은 동료 기장을 살해하고 또 다른 기장 살해를 시도한 혐의, 추가 4명을 상대로 한 살인예비 혐의, 그리고 동료들의 운항 정보를 불법 조회한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최소 3년 전부터 특정 기장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고 거주지, 출퇴근 시간, 동선을 집요하게 파악해 온 것으로 조사됐으며, 사건 직전에는 피해자 차량에 GPS를 설치하고 택배 기사로 위장하는 등의 방식으로 범행 기회를 탐색한 정황도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 송치 과정에서 그가 택한 언어는 ‘반성’이 아니라 ‘심판자’의 언어였다. “유가족이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제 과거까지 다 들추십시오”라는 발언에서, 그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가해자가 아니라 ‘더 큰 악’에 맞선 응징자, 혹은 추문까지 감수할 각오가 된 내부 고발자처럼 연출하려 했다. 이런 태도는 국내 일부 방송과 유튜브 채널에서 “철학 용어를 줄줄이 읊으며 오히려 당당한 피의자”라는 식의 보도로 재현되며, 대중의 강한 역반응을 불러왔다. SNS 공간에서는 그의 발언을 두고 두 갈래의 정서가 공존했다. 한쪽에서는 “휴브리스를 저지른 건 본인인데, 왜 남에게 네메시스를 들이대느냐”는 조롱과 분노가 쏟아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항공사·조종사 사회의 폐쇄성과 기득권 구조, 군 출신 라인의 폐해를 파헤쳐야 한다”는 구조적 문제 제기가 뒤따랐다. 전자는 개인의 범죄 책임을 부각시키고, 후자는 그가 표적으로 삼은 집단 뒤에 존재하는 권력 구조에 시선을 돌리자는 반응이다. 2. 휴브리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볼 때 휴브리스(hubris)는 그리스 비극과 윤리 사상에서 핵심 개념으로, 단순한 자만심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된 한계를 무시하고 신의 질서를 침범하는 오만”을 뜻한다. 고대 아테네 시민에게 휴브리스는 개인 덕목을 넘어 공동체를 위협하는 범죄로 인식되었고, 법정에서도 ‘휴브리스적 행위’(폭력, 모욕, 과도한 권력 남용)는 엄격히 처벌 대상이 됐다. 비극 작품에서 휴브리스는 늘 파국의 씨앗으로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과 예언을 부정하며 ‘운명보다 우위에 서려는’ 오만으로, 크세르크세스(페르시아 왕)는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바다에 다리를 놓고 그리스 침공을 감행한 오만으로,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이때 휴브리스는 단지 캐릭터의 성격 결함을 넘어, “인간이 질서와 균형을 잊을 때 어떤 파국이 기다리는가”를 보여주는 극의 구조적 장치다. 현대 사회에서도 휴브리스는 권력과 성공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위험 신호로 자주 소환된다. 글로벌 경영학·정치학 연구에서 ‘리더십 휴브리스(hubristic leadership)’는 성과에 취해 견제를 무시하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며, 윤리적 경고를 무시하는 리더의 태도를 가리킨다. 글로벌 금융위기, 엔론·월드컴 사태, 일부 빅테크·바이오 기업의 회계 스캔들 분석에서도 ‘휴브리스’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악랄한 기득권의 휴브리스”라는 김동환의 표현은 흥미로운 역전이다. 원래 휴브리스는 ‘강자의 오만’을 비판하는 개념인데, 그는 자신을 그 휴브리스에 희생된 약자로 위치시키며, 동시에 살인을 ‘네메시스’라는 이름의 응징으로 둔갑시키려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대 비극이 경고해 온 ‘오만한 인간’을 비판하는 언어를, 자기 자신의 오만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탈취한 셈이다. 3. 네메시스: 신의 응징인가, 인간의 사적 복수인가 네메시스(nemesis)는 원래 “각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공정하게 나누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출발해, 점차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오만한 자에게 내려지는 응징”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응징은 감정적 복수가 아니라, 깨진 균형을 바로잡는 우주의 조정에 가깝다. 누군가가 과도한 부와 권력, 영광을 누릴 때, 네메시스는 그가 잊고 있던 한계와 책임을 상기시키는 힘으로 등장한다. 문화적으로도 네메시스는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언젠가 돌아오는 결과’의 상징으로 소비돼 왔다. 서구 팝컬처에서 “He finally met his nemesis”라는 표현은 단순한 적수라기보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숙명의 맞수’ 혹은 ‘결과 그 자체’를 의미한다. 스포츠에서, 정치에서, 기업 경쟁에서 '네메시스'는 늘 가장 치열한 맞대결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김동환 사건에서 네메시스는 다른 방식으로 소환됐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천벌”이라 규정하며, 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도 된 듯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그의 주장 속 네메시스는 “윤리적 응징”이 아니라 “범죄를 미화하는 자기연출”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그는 누군가의 휴브리스를 응징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휴브리스가 네메시스를 부른 전형적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휴브리스 → 네메시스”라는 고전적 도식은, 여기서 “피해의식적 휴브리스 → 법의 네메시스(처벌)”라는 현대적 변주로 되돌아온다. 4. 피해의식, 엘리트 혐오, 그리고 ‘응징 욕망’의 시대 이 사건이 특히 큰 파장을 낳은 이유는, 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한국 사회의 누적된 정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김동환의 자기 서사는 “군 출신 엘리트 파일럿 집단에 의해 조직적으로 왕따·불이익을 당한 내부자”와 “폐쇄적인 항공·조종사 사회의 희생자”라는 서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는 ‘엘리트 카르텔’ 논쟁, 학벌·출신·라인에 대한 불신과 쉽게 겹쳐 읽힌다. SNS에서 일부 이용자들은 “항공사와 조종사 사회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외 여러 스캔들(의료계 전공의 논란, 로펌·언론·관료 출신 네트워크 논쟁, 기업 승계 이슈 등)에서 대중이 보이는 감정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카르텔’에 대한 분노, ‘설명되지 않는 불공정’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쌓인 ‘응징 욕망’이 함께 작동한다. 여기서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하나의 상징 언어로 기능한다. “저들의 휴브리스가 언젠가 네메시스를 부를 것”이라는 표현은, 기득권과 권력 구조를 향한 시대적 경고로 소비된다. 다만 김동환 사건처럼, 이 언어가 범죄적 행위를 포장하는 데 동원될 때, 대중은 즉각적으로 선을 긋는다. 요약하면, 한국 사회의 다수는 ‘구조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사적 폭력’을 네메시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5. 문화·철학에서 본 현대판 휴브리스와 네메시스 오늘날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철학·문학을 넘어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대중문화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된 개념이다. 기업 경영에서 ‘성공한 CEO의 휴브리스’는 인수·합병 실패, 무리한 확장, 내부 통제 붕괴로 이어지는 패턴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인다. 정치에서는 장기 집권, 사법 장악 시도, 언론 통제 등 권력 집중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만한 확신’을 지적할 때 동원된다. 한편, 대중문화는 이 고전 개념을 보다 직관적인 감정 언어로 재해석해 왔다. 히어로 영화에서 ‘세계의 구원자’로 추앙받던 인물이 자신의 힘과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잃고 파멸로 치닫는 구조, AI·기술 발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휴브리스”로 묘사되는 과학 다큐멘터리의 서사 등은 모두 이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잊을 때, 응답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 돌아온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이런 점에서 김동환 사건은 고대 비극의 언어를 빌려온 현대판 비극이다. 그는 “타인의 휴브리스를 응징하는 네메시스”를 자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것은 “자기 휴브리스를 깨닫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 네메시스의 대상이 된 한 개인”의 초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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