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이 추진하는 초대형 반도체 생산단지 ‘테라팹(Terafab)’과 TSMC 간 협력 가능성을 사실상 인정했다. 다만 계약 체결이나 투자 규모, 운영 주체 등 핵심 조건은 전혀 공개되지 않아, 현재 단계는 ‘확정된 파트너십’보다 공급망 확보를 위한 탐색적 협의에 가깝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팀 컬펀 전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2일(현지시간) 자신의 뉴스레터 컬피엄(Culpium)에서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TSMC가 테슬라·스페이스X·xAI가 텍사스에서 추진하는 테라팹의 반도체 공장 운영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컬펀은 TSMC가 테라팹을 향후 텍사스 신규 반도체 캠퍼스의 ‘앵커 고객(anchor client)’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머스크는 3일 X에서 컬펀의 후속 보도에 답하며 “그저 관련 논의였지만, 아마도 뭔가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이는 TSMC와의 접촉 자체는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구속력 있는 합의가 아직 없다는 점을 내비친 발언으로 읽힌다. 테라팹과 TSMC, 테슬라, 스페이스X, xAI 어느 쪽도 계약서, 지분 구조, 생산 공정, 장비 조달 계획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텍사스 TSMC’ 구상과 맞물린다
이번 협력설이 주목받는 이유는 TSMC의 텍사스 신규 투자설이 나온 직후라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1일 TSMC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텍사스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새 캠퍼스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복수의 팹이 들어설 수 있으며, 팹 한 곳당 투자비가 최소 20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계획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미국 의회의 첨단 제조업 세액공제 연장 여부가 주요 변수로 거론됐다.
TSMC가 공식적으로 밝힌 미국 투자 계획과 비교하면 시장 보도의 숫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TSMC는 2025년 3월 애리조나 투자 규모를 기존 650억 달러에서 총 1650억 달러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추가 계획에는 3개 신규 웨이퍼 팹, 2개 첨단 패키징 시설, 연구개발(R&D) 센터가 포함됐다. 일부 재인용 기사에서 언급된 애리조나 2650억 달러는 TSMC의 공식 발표 수치와 일치하지 않아, 본문 인용 시 1650억 달러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TSMC의 애리조나 1공장은 2024년 말 양산을 시작했고, 2공장은 장비 반입과 설치를 거쳐 2027년 하반기 양산이 목표다. TSMC는 3공장 공사도 시작했으며, 4공장과 첫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 인허가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텍사스는 TSMC에 ‘두 번째 미국 제조 축’이 될 수 있지만, 회사 측은 텍사스 투자 보도에 대해 시장 루머에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168억 달러로 시작하는 ‘칩 자급’ 실험
테라팹은 머스크의 자동차·로봇·우주·AI 사업을 하나의 반도체 공급망으로 묶으려는 프로젝트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는 8월 텍사스 그라임스 카운티에 첫 단계로 168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텍사스 주지사실에 따르면 1단계 사업은 3000개 일자리를 창출할 전망이다. 스페이스X는 현지 및 인근 지역 인력 채용을 우선하겠다는 방침도 제시했다.
현지 매체 스펙트럼뉴스는 테라팹이 약 1억 제곱피트 규모로 계획된 반도체 생산시설이라고 보도했다. 축구장 1700개 이상에 해당하는 면적이고, 길이는 3마일을 넘는 초대형 단지다. 8월 착공 후 부지 정비가 진행 중이며, 스페이스X는 2027년 말 제한적 운영 개시를 목표로 제시했다. 주 정부는 3000만 달러 보조금을 지원했고, 그라임스 카운티는 세제 혜택을 승인했다.
프로젝트의 최종 투자 규모는 더욱 크다. 스페이스X가 텍사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 단계가 완성될 경우 누적 투자액은 최대 1190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공장 부지에는 로직 반도체뿐 아니라 메모리, 리소그래피, 첨단 패키징, 테스트까지 포함하는 수직 통합 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 제시됐다. 이는 외부 파운드리와 패키징 업체에 의존하던 머스크 계열사들이 장기적으로 핵심 AI 칩 공급망을 직접 통제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테슬라는 테라팹에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FSD), 로보택시, 옵티머스 휴머노이드 로봇용 칩을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스페이스X는 스타링크 위성군 및 우주 기반 데이터센터용 칩 수요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xAI 역시 AI 연산 수요처로 거론된다. 머스크는 테라팹이 장기적으로 연간 1테라와트(TW)의 컴퓨팅 용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텔 14A 전략의 변수
테라팹은 당초 인텔의 차세대 14A 공정을 중심축으로 삼는 그림이었다. 로이터는 지난 4월 머스크가 테슬라가 인텔의 14A 공정을 활용해 테라팹용 칩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인텔에는 14A의 첫 대형 외부 고객을 확보할 기회였고, 머스크에는 TSMC에 집중된 최첨단 파운드리 공급망을 다변화할 기회였다.
하지만 14A는 아직 대량 양산 실적이 검증되지 않은 차세대 공정이다. 머스크 역시 당시 “테라팹이 확장될 시점이면 14A가 상당히 성숙하거나 본격 가동할 준비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테라팹의 성패는 공장 건설뿐 아니라 인텔이 14A를 계획대로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로이터는 테라팹의 장비 구매 주체, 공장 운영 주체, 가동 시점, 자금 조달 구조 등 핵심 내용이 당시에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컬피엄 보도와 이를 인용한 외신들은 테라팹 내 인텔의 역할을 둘러싼 협의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인텔과 테슬라·스페이스X가 협력 종료 또는 계약 변경을 공식 발표한 것은 아니다.
TSMC가 들어오면 달라지는 것
TSMC 협력이 현실화한다면 테라팹은 단순히 머스크 계열사의 전용 칩 공장 프로젝트가 아니라, TSMC의 미국 생산능력 확대와 결합한 대형 수요 연합으로 성격이 바뀔 수 있다. TSMC 입장에서는 테슬라·스페이스X·xAI가 제시하는 장기 AI 칩 수요를 바탕으로 텍사스 신규 팹의 투자 타당성을 높일 수 있다. 머스크 측에는 최첨단 공정의 양산 수율, 장비 조달 능력, 공정 운영 인력, 패키징 생태계 등에서 세계 최대 파운드리의 실행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TSMC에는 부담도 적지 않다. TSMC의 전통적 사업모델은 고객의 칩 설계를 위탁받아 자사 팹에서 제조하는 순수 파운드리다. 특정 고객의 대규모 자체 생산단지를 직접 운영하거나, 고객 주도의 수직통합형 반도체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는 방식은 기존 모델과 다소 거리가 있다. 테라팹이 목표로 하는 2나노미터급 공정, 대규모 전력·용수·인력 확보, 첨단 패키징 체계 구축은 각각 독립된 대형 프로젝트에 가깝다.
TSMC의 웨이저자 CEO는 4월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새 팹을 짓는 데 2~3년이 걸리고, 생산량을 끌어올리는 데 다시 1~2년이 걸린다”며 반도체 제조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TSMC가 AI 수요 대응을 위해 3나노미터 증설을 서두르고 있음에도, 새로운 생산능력이 실제 공급으로 이어지는 데는 장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결국 테라팹의 진짜 시험대는 발표 규모가 아니라 ‘양산 실행력’이다. 1단계 168억 달러와 최대 1190억 달러라는 투자 청사진, 1억 제곱피트 부지, 연 1테라와트 컴퓨팅 용량이라는 목표는 시장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2나노미터급 공정은 장비·설계·마스크·수율·패키징·전력·용수·숙련 인력이라는 복합 난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머스크의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발언은 TSMC와의 협상이 테라팹의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는 단서임을 보여주지만, 아직은 공장 운영 또는 파운드리 계약이 확정된 것으로 볼 단계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