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불편하다. 인물들은 쉽게 구원받지 못하고, 관객 역시 누군가의 고통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데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자극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묵직한 질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도 관객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스크린은 꺼졌지만, 해고와 계급, 욕망과 죄책감, 사랑과 존엄을 둘러싼 질문은 관객의 일상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의 현실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묻는 영화다. 영화는 대기업 공장에서 해고된 호석과 아내 미옥, 그리고 이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와 부유한 남편 상우, 두 부부의 관계가 맞물리면서 벌어지는 감정과 균열을 따라간다.
이창동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제목 그대로 사랑에 관한 영화”라며 “어떤 사랑이 가능한지, 사랑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담았다고 말했다. 집단해고와 노동의 소멸이 가속되는 시대일수록 결국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인식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해고'가 한명의 인간과 가족에게 던진 일자리 이상의 상실
호석의 해고는 월급의 중단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장 용접공으로서의 숙련과 자부심, 가족을 책임지는 남편·아버지라는 역할, 사회 안에서 자신을 설명해 온 언어가 한꺼번에 흔들린다. 영화는 실직 이후 그가 분노와 침묵, 우울에 갇히는 과정을 통해 ‘노동의 상실’이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열 살 아들 철은 부모가 설명하지 않는 비극을 조용히 흡수하는 존재로 배치된다. 영화는 한 사람의 실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의 상실이 가족의 언어와 몸짓, 부부의 욕망, 아이의 정서까지 어떻게 바꾸는지를 비춘다.
미옥은 마스크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지탱한다. 그는 붕괴한 남편을 돌보는 희생적 아내로 머물지 않는다. 남편의 불안정한 감정, 아들의 성장, 자신의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더 나은 삶을 욕망하고, 부유한 상우·예지 부부의 세계를 관찰한다. 이 영화의 계급 문제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욕망과 자존심이 있으며, 부유한 사람에게도 불안과 결핍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욕망의 조건은 평등하지 않다. 상우와 예지는 경제력, 주거, 이동의 자유, 사회적 안전망을 갖고 있다. 반면 호석과 미옥은 관계가 무너질 때 생계와 가족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영화는 모두가 상처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누가 더 쉽게 관계를 빠져나가고 누가 더 큰 대가를 치르는지는 분명히 보여준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이 작품을 "부유층과 노동계층 두 부부 사이의 경제적·감정적 불안에 관한 매혹적인 명상”으로 평가했다.
〈가능한 사랑〉은 특정 공장의 과거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이면서, 자동화와 인공지능, 구조조정, 플랫폼 노동, 투자자본의 압력 속에서 ‘일하는 인간’이 어떤 불안에 놓이는지를 묻는 동시대적 영화다. 호석의 해고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그는 공장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해 왔고, 가족에게 생계를 제공한다는 역할로 자존감을 지켜왔다. 그 직업이 사라지면서 임금뿐 아니라 자기서사까지 무너진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율,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전체를 읽는 열쇠다. 영화 속 탐욕은 재산이나 성적 욕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타인의 안정된 삶, 배우자의 몸과 마음, 자유, 사회적 지위,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해석하고 이야기할 권리까지 모두 ‘탐냄’의 대상이 된다.
호석과 미옥은 상우와 예지가 가진 부와 여유를 본다. 예지는 자신이 갖지 못한 현실성, 진짜 삶의 감각을 호석 부부에게서 구한다. 상우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미옥의 마음과 욕망을 마주한다. 영화는 누구를 일방적 가해자나 순결한 피해자로 고정하지 않는다.
할리우드리포터에 따르면 영화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은 국제 감독들의 재해석 기획과 연결돼 출발했다. 하지만 이창동은 원전의 열 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만을 공유할 뿐, 계율이 요구하는 단순한 도덕적 결론을 거부한다. 영화는 “탐내지 말라”고 훈계하는 대신, 인간이 왜 탐내는지, 욕망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 그리고 욕망이 계급 격차 속에서 왜 더 비참해지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이창동은 계급적 비대칭은 지우지 않는다. 부유한 사람의 관심과 환대, 진정성 있는 공감도 상대에게는 침입이나 압박이 될 수 있다. ‘좋은 의도’는 권력관계를 없애지 못한다. 영화가 계급을 다루는 방식은 이 지점에서 날카롭다.
카메라는 연대인가, 착취인가
〈가능한 사랑〉의 현대성은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에게 있다. 그는 해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려는 선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호석과 미옥의 삶은 기록되는 동시에 작품의 재료가 된다.
상우가 예지의 태도를 “메소드 연기”라고 비꼬고, 예지가 “나는 이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것”이라고 맞서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논쟁이다. 타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는 진심일 수 있다. 그러나 촬영을 결정하고, 장면을 선택하고, 편집해 서사로 만드는 권한은 감독에게 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예지가 미옥의 공장 노동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지만 그 노동이 단순하고 반복적”이라며 "개인적 갈등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짚었다. 노동자에게는 생존 그 자체인 일이 창작자에게는 극적이지 않은 평범한 장면으로 비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타인의 고통과 삶을 예술로 다루는 사람의 윤리를 되묻는다.
가디언은 〈가능한 사랑〉을 ‘착취와 우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했다. 가디언은 예지가 호석 부부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관찰자와 친구, 연대자와 침입자, 기록자와 소비자의 경계는 흐려진다고 봤다. 동시에 영화가 이 관계를 풍자나 폭로로 즉시 결론 내리지 않고, 모호함과 불편함을 견딘다고 평가했다.
장면이 보여주는 계급의 언어…예지·미옥 각자의 카메라,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영화의 흥미는 거대한 사건보다 사소한 장면의 디테일에 숨어 있다. 장례식장 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마주하지 못하고 차에 남는 호석은 해고 이후 트라우마로 인해 애도할 힘조차 잃은 인물이다. 미옥의 결혼반지가 주차장에서 빠지고, 상우가 포르쉐 헤드라이트로 반지를 찾아주는 장면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결혼반지는 느슨해진 부부관계를, 값비싼 자동차의 빛은 상우가 속한 계급의 물질적 여유를, 그리고 그 빛에 의존해 반지를 되찾는 상황은 상호 도움처럼 보이는 계급적 비대칭을 암시한다.
미옥이 예지의 명품 가방을 몰래 사진으로 찍어 가격을 검색하는 장면도 중요하다. 예지는 노동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지만, 미옥 역시 예지의 가방과 옷차림을 통해 그가 속한 세계를 읽는다. 카메라를 쥔 사람이 늘 보는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이 늘 보여지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역전이다.
상우 부부의 별장과 해변은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동시에 소유의 경계를 시각화한다. 우정과 환대처럼 보이는 이 초대는 동시에 침입의 경험이다. 가난한 가족은 부유한 집의 문턱을 넘지만 그 공간의 주인이 되지는 못한다. 아름다운 바다, 넓은 집, 사적인 해변은 자유의 풍경인 동시에 소유의 풍경이다.
그 공간에서 호석 부부가 느끼는 매혹과 불편함은 돈의 차이가 단지 소비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몸의 자세, 대화의 방식, 관계의 규칙을 바꾼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다와 별장, 자동차와 명품 가방은 영화에서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계급이 관계의 거리와 몸짓, 말투까지 어떻게 규정하는지 보여주는 언어다.
소설가 이창동, 8년 만의 귀환과 ‘노동의 소멸’…영화로 말하지 않은 것을 읽게 하다
〈가능한 사랑〉은 2018년 〈버닝〉 이후 8년 만에 나온 이창동 감독의 일곱 번째 장편이다. 작품은 2026년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공개돼 심사위원대상인 은사자상을 받았다.
이창동 감독 영화에서 남성 인물들은 종종 역사와 사회가 만든 폭력의 매개자이면서 피해자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국가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고, 〈오아시스〉의 종두는 사회적 배제 속에서 비틀린 욕망을 드러냈다. 〈가능한 사랑〉의 호석은 그 계보를 잇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노동 이후의 남성’을 보여준다. 그가 분노하고 술을 마시며 침묵하는 것은 가족을 해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영화는 그 행동을 면죄하지 않으면서도 그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끝까지 추적한다.
이창동은 소설가로 등단한 뒤 영화감독이 됐다. 그 문학적 이력은 〈가능한 사랑〉에서 특히 또렷하다. 이 영화는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오래 바라본다. 장례식장 앞 차 안의 침묵, 술자리의 어색한 농담, 가방 가격을 검색하는 손, 바닷가 별장에서 생기는 낯선 정적, 카메라가 켜진 순간 달라지는 표정이 관계의 진짜 내용을 드러낸다.
가디언은 이 작품을 “매우 소설적인 영화"라고 평하면서, "관객을 지적인 존재로 대우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영화는 설명을 과잉 공급하지 않는다. 인물의 욕망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지 않고, 관객이 각 장면의 말과 침묵 사이를 스스로 읽게 만든다.
영화의 느린 호흡도 이와 연결된다. 165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사건을 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고 이후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며 사람을 갉아먹는지를 체감하게 하는 형식이다. 자본은 구조조정을 빠르게 결정하지만, 한 가족이 상실을 견디고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간은 결코 빠르지 않다.
‘가능한’ 사랑의 조건이 던진 질문
〈가능한 사랑〉은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고의 상처, 자본의 폭력, 계급 격차, 부부의 균열, 창작의 윤리적 난점은 사랑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창동이 말하는 사랑은 동정이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권력과 안전망을 자각하는 태도에 가깝다.
타인을 이해했다고 쉽게 선언하지 않고, 끝내 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것. 고통을 감동의 재료로 소유하지 않는 것. 계급의 차이를 선의라는 말로 지우지 않는 것.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이 불편하고 긴 실천에서 시작된다.
〈가능한 사랑〉은 그래서 완성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제목의 ‘가능한’은 확신이 아니라 미래형 질문이다. 해고된 노동자와 부유한 감독 부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카메라는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고 그의 삶을 기록할 수 있는가. 상처 입은 부부는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관객은 이 모든 고통을 본 뒤, 안전한 감상자로 남지 않을 수 있는가.
〈가능한 사랑〉은 바로 그 어렵고도 불완전한 사랑의 조건을, 해고와 계급이라는 한국 사회의 가장 차가운 현실 속에서 묻는 영화다. 영화의 가장 큰 여운은 바로 그 질문이 스크린 밖 관객에게까지 이어진다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