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SK하이닉스가 실리콘밸리를 거점으로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브랜드 ‘SK hynix Ventures’를 출범시키며 인공지능(AI) 인프라 전반으로 투자 보폭을 넓혔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넘어 AI 컴퓨팅, 데이터센터, 시스템 소프트웨어, 광(光) 인터커넥트까지 선제 투자하겠다는 선언이다. AI 산업의 경쟁 축이 단순한 반도체 성능에서 메모리·네트워크·전력·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풀스택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SK하이닉스는 9월 18일 “글로벌 AI 생태계 내 전략적 파트너십 확대와 미래 혁신기술 확보를 위해 CVC 브랜드 ‘SK hynix Ventures’를 출범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현지시간 17일 실리콘밸리에서 첫 ‘SK hynix Ventures Day’를 개최했으며, 곽노정 대표이사 사장과 주요 경영진, 글로벌 벤처캐피털(VC) 관계자, AI 스타트업 경영진이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출범은 신설 투자조직의 탄생이라기보다 2015년부터 이어온 벤처투자 기능의 전면적 리브랜딩과 전략 고도화에 가깝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법인 SK하이닉스 아메리카(SKHYA)를 중심으로 2015년부터 미국·중국·이스라엘·일본의 반도체 및 신흥기술 초기기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VC 펀드에 출자해 왔다. 회사 측은 해당 CVC 활동의 누적 수익이 누적 투자금의 두 배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다만 투자금 규모, 회수 완료 수익과 평가이익의 구분, 내부수익률(IRR), 개별 포트폴리오 및 회수 사례는 공개하지 않았다.
SK하이닉스는 그동안의 벤처투자가 미래 기술 흐름을 탐색하는 ‘테크 센싱(Tech Sensing)’과 신규 사업 기회를 찾는 ‘패스 파인딩(Path Finding)’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새 브랜드 아래에서는 유망 기업을 발굴하는 단계를 넘어, 포트폴리오 기업과 장비 공동 개발, 개념검증(PoC), 공급망 연결, 고객 발굴을 추진하는 전략적 투자자로 역할을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실제 회사는 기존 투자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장비 공동개발 및 PoC를 진행하고, 신규 공급망과 고객을 발굴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투자 대상도 기존 반도체 및 신흥기술 중심에서 AI 인프라 전체로 넓힌다. 구체적으로는 AI 컴퓨팅, 데이터센터, 시스템 소프트웨어, 광 인터커넥트가 4대 중점 영역이다.
이는 AI 모델의 파라미터 규모와 추론 수요가 급증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성능 경쟁이 GPU 확보에만 머물지 않고, 메모리 용량과 대역폭, 가속기 간 데이터 전송, 전력 효율, 자원 배분 소프트웨어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축적한 메모리 경쟁력을 데이터센터 내부의 데이터 이동과 처리 효율을 좌우하는 광학 연결 및 시스템 소프트웨어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특히 광 인터커넥트는 AI 데이터센터의 차세대 승부처로 꼽힌다. 대규모 AI 학습과 추론 환경에서는 수천~수만 개 가속기 사이에서 막대한 데이터를 지연 없이 주고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기 신호 기반 연결만으로는 대역폭, 발열, 전력소비의 한계가 커질 수 있다. 광 기반 시스템은 전송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으로 거론된다.
SK하이닉스가 메모리와 광 연결 기술,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투자 범주에 묶은 것은 “더 많은 메모리를 생산하는 기업”을 넘어 “메모리가 AI 시스템 안에서 더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만드는 기업”으로 역할을 넓히려는 포석이다.
이번 벤처 브랜드 출범이 곧 대규모 펀드 조성이나 신규 투자 집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SK하이닉스는 펀드 규모, 연간 투자금, 투자 단가, 투자 단계, 전담 법인의 법적 구조, 새 포트폴리오 기업 등 구체적 조건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시장이 향후 확인해야 할 핵심은 브랜드 출범 자체보다 실제 투자 집행과 기술 협력의 성과다.
광 인터커넥트, AI 추론 최적화 소프트웨어, 데이터센터 냉각·전력 기술, 차세대 메모리 시스템 스타트업의 지분 투자에 SK하이닉스가 얼마나 빠르게 등장하는지, 그리고 이들이 공동개발·장기 공급계약·고객 공동 확보로 이어지는지가 CVC 전략의 실질적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곽노정 사장은 “AI 시대의 경쟁력은 혁신 기술을 신속하게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파트너·스타트업이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생태계 역량에서 나온다”며 “전략적 투자와 기술 협력을 기반으로 AI 인프라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글로벌 파트너로 성장하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의 이번 행보는 HBM 호황으로 확보한 기술·자본 경쟁력을 스타트업 투자와 공동개발로 연결해 AI 공급망 내 영향력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다만 아직은 방향성을 제시한 ‘전략 선언’의 성격이 강하다. 향후 투자 규모와 회수 성과, 핵심 스타트업과의 협업 사례가 공개돼야 SK하이닉스 벤처스가 단순한 기술 탐색 창구를 넘어 AI 인프라 생태계의 실질적 설계자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