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은주 기자] 세계 최대 파운드리 TSMC가 회사의 생존 경쟁력인 공정 연구개발(R&D)과 핵심 제조 데이터 앞에서 AI를 ‘강력하지만 판단력이 부족한 세 살짜리 슈퍼맨’으로 규정하며 명확한 경계선을 그었다. AI 반도체 공급망의 한가운데 선 기업이 내놓은 메시지는 단순한 기술 보수론이 아니라, AI 도입의 성패가 ‘활용 범위’보다 ‘기밀·책임·최종판단을 누가 통제하느냐’에 달렸다는 산업 현장의 경고로 읽힌다.
finimize, tradingview, capitalbrief, taipeitimes, seekingalpha에 따르면, TSMC 집행부사장 겸 공동 최고운영책임자(Co-COO) 미위제(Y.J. Mii)는 9월 15일(현지시간) 모교인 국립대만대(NTU) 포럼에서 “AI는 세 살짜리 슈퍼맨과 같다. 매우 강력하지만 자신이 어떤 피해를 일으킬지 모르고, 옳고 그름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민감한 R&D 정보에 AI를 적용할 때 정보 유출 또는 데이터 손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발언은 단순히 AI 성능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AI가 대규모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과 기업 기밀의 맥락·책임을 판단하는 능력 사이의 간극을 짚은 것이다.
‘공정 레시피’는 TSMC의 금고
TSMC가 보호하려는 대상은 일반적인 사무 문서나 소스코드만이 아니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성패를 좌우하는 공정 파라미터, 소재 조합, 장비 조건, 수율 개선 노하우, 결함 분석 결과 등 이른바 제조 ‘레시피’다. 이는 회로 설계도만으로 복제할 수 없는 파운드리 경쟁력의 핵심이며, 고객사가 설계한 칩을 실제로 대량 생산 가능한 제품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축적된다.
미위제 공동 COO는 직원이 AI를 부적절하게 사용할 경우 데이터 유출이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외부 AI 모델에 입력한 데이터가 어떤 방식으로 저장·처리·재사용되는지, 에이전트형 AI가 외부 시스템과 연결될 때 권한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결과물이 잘못된 공정 판단으로 이어졌을 때 누가 책임지는지 등이 선단 공정 R&D에서는 모두 경영 리스크가 된다. TSMC가 민감한 연구정보 처리에 보수적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다.
특히 파운드리 산업에서 데이터 유출은 일반적인 영업비밀 노출보다 파급력이 더 클 수 있다. 하나의 공정 조건이 단독으로는 큰 의미가 없더라도, 장기간 축적된 공정 데이터·장비 운용 지식·수율 데이터와 결합되면 경쟁사가 기술 격차를 좁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TSMC의 경계는 AI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기업 내부의 ‘데이터 분류’와 ‘권한 통제’ 없이 AI를 업무 자동화 도구로 확장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AI는 ‘정답이 있는 일’에 우선 배치
공동 COO의 발언은 AI의 쓰임을 업무 특성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프로그래밍과 전자설계자동화(EDA) 분야에서 AI가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입력과 출력이 비교적 명확하고, 대규모의 구조화된 학습 데이터가 존재하며, 인간 전문가가 결과물을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질 특성, 미지의 공정변수, 장비 한계, 양산 수율 등이 얽히는 최첨단 공정 개발은 AI가 곧바로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봤다.
미 공동 COO는 “AI는 데이터를 계산할 수는 있어도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취지로 말하며, 최종적인 중요한 결정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AI를 배제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AI가 제시한 확률·추천·시뮬레이션 결과와 경영·기술상 ‘결정’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A14·A10의 병목은 ‘알고리즘’이 아니다
TSMC의 신중론이 더 주목받는 이유는 이 회사가 AI 붐의 대표적 수혜 기업이기 때문이다. TSMC는 엔비디아, 애플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주요 생산 파트너이면서 고성능컴퓨팅(HPC)과 AI용 첨단 공정 수요 증가에 맞춰 막대한 설비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공동 COO는 AI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에 당장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A14와 A10 같은 미래 공정은 충분히 성숙한 장비 확보를 포함한 물리적·제조상 제약에 묶여 있으며, 이는 AI가 자동으로 해소할 수 없는 병목이라는 것이다.
TSMC가 공식적으로 제시한 A14 로드맵도 이 판단의 무게를 보여준다. 회사는 A14가 2세대 나노시트 트랜지스터 구조를 기반으로, N2 대비 같은 전력에서 10~15%의 성능 향상 또는 같은 속도에서 25~30%의 전력 절감, 약 20%의 집적도 개선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양산 목표 시점은 2028년이다. 즉 차세대 노드 경쟁은 AI 모델의 성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트랜지스터 구조, 노광·식각·증착 장비, 재료, 공정통합, 수율 안정화가 동시에 성립해야 가능한 복합 제조 경쟁이다.
TSMC의 매출 구조도 왜 이런 공정 데이터가 ‘왕관의 보석’으로 취급되는지 드러낸다. 2025년 2분기 기준 TSMC 웨이퍼 매출에서 3나노미터 공정은 24%, 5나노미터는 36%, 7나노미터는 14%를 차지했다. 7나노미터 이하 첨단 공정의 합산 비중은 74%였다. 같은 분기 매출은 9337억9000만 대만달러, 순이익은 3982억7000만 대만달러였으며, 설비투자액은 96억3000만달러에 달했다. 첨단 공정의 수율·가동률·고객 신뢰를 흔들 수 있는 AI 활용 오류가 단순한 시스템 문제를 넘어 실적과 경쟁력 리스크가 될 수 있는 구조다.
TSMC는 2025년 자본적지출 예산으로 380억~420억달러를 제시했고, 이 중 약 70%를 첨단 공정에 배정하겠다고 밝혔다. AI 수요가 대규모 설비 증설을 이끄는 동시에, 실제 반도체 생산의 경쟁우위는 여전히 장비 확보와 공정 완성도, 그리고 축적된 제조지식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AI 반도체 호황의 역설
TSMC 사례는 생성형 AI 시대의 산업적 역설을 보여준다. AI 확산은 TSMC에 최첨단 반도체 수요와 투자 기회를 제공하지만, 같은 AI는 TSMC 내부에서는 공정기밀 유출·허위 결과·책임소재 불명확성이라는 새로운 공격 표면을 만든다. AI를 위한 칩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기업이 핵심 R&D 현장에서는 AI에 제동을 거는 이유다.
반도체뿐 아니라 배터리, 제약, 방산, 정유·화학, 금융 모델링처럼 독자 제조·연구 데이터가 기업가치의 근간인 산업에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AI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데이터와 의사결정까지 AI에게 맡길 것인가”가 경쟁력과 보안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TSMC가 ‘세 살짜리 슈퍼맨’ 비유로 제시한 답은 분명하다. AI는 강력한 보조자일 수 있지만, 아직 기업의 핵심 기술과 최종 판단을 맡길 주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