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희선 기자] 제주도가 국내 최초로 실제 입주민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에서 가스보일러 없이 냉방·난방·급탕을 모두 전기로 처리하는 실증에 착수했다.
‘전기화’ 자체보다 주목할 대목은, 아파트라는 한국형 주거 공간의 구조적 난제를 겨냥했다는 점이다. 가구별 보일러와 가스배관에 의존해온 공동주택 에너지 시스템을 히트펌프와 중앙급탕·축열 설비로 재설계하는 시험대가 제주에 마련됐다.
제주도는 15일 제주개발공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LG전자와 ‘공동주택 냉난방 전기화 및 전력열전환(P2H) 실증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대상은 서귀포시 효돈동 신효아파트로, 지하 1층·지상 7층의 12세대 공공임대주택이다. 제주개발공사의 리모델링 사업과 연계해 세대별 2kW, 공용부 5kW 규모 태양광 설비와 고효율 전기 인덕션, 스마트 에너지관리체계를 도입하고, 세대별 냉난방과 중앙 급탕을 전기 기반 히트펌프로 전환한다. 계획 기준 태양광은 총 29kW 규모다.
설비 방식은 ‘세대별 히트펌프 1대+공용부 중앙급탕’ 구조다. 각 세대에 설치되는 히트펌프는 냉방과 바닥난방을 담당하고, 온수는 공용부의 중앙 급탕 설비에서 공급한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히트펌프와 고밀도 축열 장치를 연계한 공동축열조를 설계·구축하고, LG전자는 히트펌프 공급·기술지원·성능 평가를 맡는다. 설비 설치는 올해 말까지 마치고, 내년 1~3월 시운전을 거쳐 6월부터 입주자가 실제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 사업의 첫 번째 관문은 공동주택 급탕이다. 아파트 전기화에서 냉난방보다 까다로운 부분은 많은 세대가 동시에 온수를 사용하는 아침·저녁 피크 시간대다. 세대마다 대형 온수 저장탱크를 둘 경우 공간과 하중, 배관, 유지관리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제주 실증은 이를 공용부 중앙 급탕과 축열조로 풀겠다는 구상이다. 전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시간에 히트펌프로 물을 데워 열 형태로 저장한 뒤, 입주민의 실제 급탕 수요가 발생하는 시간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전력망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미 에너지부와 전력 유연성 관련 연구들은 물을 저장하는 급탕 시스템이 전력 사용 시점과 온수 소비 시점을 분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전력 피크 시간에는 가열을 줄이고, 전력 공급이 넉넉하거나 가격·탄소집약도가 낮은 시간에 미리 열을 저장하는 수요반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높은 저장 온도는 열손실과 효율 저하를 낳을 수 있어, 단순 축열이 아니라 세밀한 제어 알고리즘과 적정 용량 설계가 성패를 가른다.
제주라는 입지도 상징적이다. 제주도는 풍력과 태양광이 빠르게 늘면서 재생에너지 과잉발전과 출력제어 문제를 경험해왔다. 한국에너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제주 풍력·태양광 출력제어는 2018년 15건, 1365MWh에서 2022년 132건, 2만8853MWh로 급증했다. 최근 전력시장 제도 변화 이후 출력제어가 크게 줄었다는 발표도 나왔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계통에서 공급과 수요의 시간차를 조정해야 한다는 구조적 과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축열조는 남는 전기를 ‘열 배터리’처럼 흡수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배터리가 전기를 전기로 저장한다면, P2H는 잉여 전력을 난방과 온수용 열로 전환해 저장한다. 특히 주거부문의 난방·급탕은 열 수요가 명확한 만큼, 전기저장장치(ESS)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재생에너지 변동성에 보완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효과는 태양광 발전 시간, 입주민 급탕 패턴, 축열 용량, 전기요금 체계, 배전망 여유도에 따라 달라진다. 현 단계에서 이 실증의 비용 절감률이나 탄소 감축량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히트펌프의 에너지 효율 잠재력은 분명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적절히 설치·운영된 히트펌프가 난방 시즌 평균 전기 1단위로 열 3~5단위를 공급할 수 있으며, 현재의 히트펌프는 가스보일러보다 에너지 효율이 3~5배 높다고 평가한다. 이는 외부 공기나 물, 지중의 저온 열을 끌어와 실내 난방·급탕에 전달하기 때문이다. 전기를 열선처럼 직접 열로 바꾸는 전기난방과는 원리가 다르다.
다만 ‘전기화=무조건 저렴하고 무조건 친환경’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히트펌프의 실제 성능은 외기온도, 건물 단열 성능, 저온 바닥난방과의 조합, 급탕 온도, 기기 제상 운전, 배관 열손실에 따라 달라진다. 사용 전력의 탄소배출량도 전력계통의 발전원 구성에 좌우된다. IEA는 건물 난방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연간 약 40억t으로 세계 배출량의 10% 수준이라고 분석하면서도, 히트펌프 확대의 기후효과는 건물 효율 개선과 전력부문 탈탄소화가 함께 진행될 때 커진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번 실증이 한국 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동주택에서 가스배관과 개별보일러를 대체할 수 있는지를 실제 거주 조건에서 확인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제품 시연을 넘어선다. 실증의 성패는 경동나비엔·귀뚜라미·린나이 등 가스보일러 3사에는 ‘보일러 없는 아파트’ 시대에 대비하라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국내 주택 난방·급탕 시장이 가스보일러와 개별난방을 중심으로 형성돼 온 만큼, 히트펌프와 중앙급탕·축열조·태양광·에너지관리시스템(EMS)이 결합한 공동주택 전기화가 상용화될 경우 기존 보일러 제조사의 주력 제품군과 설치·서비스 생태계가 동시에 재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동나비엔은 2025년 사업보고서에서 가정용 보일러와 온수기가 각각 매출의 38%, 45%를 차지한다고 밝혀 두 품목 비중이 83%에 이른다. 경동나비엔은 이미 고효율 히트펌프와 히트펌프 온수기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지만, 제주 사례는 업계 경쟁의 기준이 단품 보일러의 열효율에서 ‘냉방·난방·급탕·전력제어’를 묶는 통합 HVAC 역량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신효아파트는 ‘보일러를 없앤 집’이 아니라, 열을 전력계통의 유연성 자원으로 바꾸는 시험장에 가깝다. 입주민이 체감할 온수 품질과 관리비, 그리고 전력망이 얻을 피크 완화 효과까지 동시에 입증해야 제주 12가구의 실험이 전국 아파트 리모델링 시장의 표준으로 확장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