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은주 기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서버용 D램과 기업용 SSD까지 동시에 빨아들이면서,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병목이 ‘HBM 부족’에서 ‘전 품목 공급 제약’으로 번지고 있다.
KB증권이 7일 “최근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대형 데이터센터 기업)들의 내년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전년 대비 60% 급증한 1조3000억 달러로 급격히 상향 조정되고 있다”며 “AI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전례 없는 공급 부족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현재 3분기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재고는 10일 미만까지 떨어진 상태”라며 “단순한 수요 회복을 넘어 판매 가능한 물량 자체가 고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재고가 짧다는 것은 가격 협상력이 공급자 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데이터센터 고객은 PC·스마트폰 제조사보다 제품 인증, 서버 설계, 장기 조달계약의 제약이 큰 만큼, 필요한 사양의 메모리를 제때 확보하지 못할 경우 단기적으로 대체 공급처를 찾기 어렵다. 공급 부족이 현실화할수록 단순 출하량보다 제품 믹스와 계약가격, 장기공급계약(LTA) 유무가 실적을 좌우하게 된다.
HBM4가 범용 D램을 밀어내는 구조
이번 사이클의 가장 큰 특징은 고부가 HBM 생산 확대가 범용 D램 공급을 늘리는 대신 오히려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KB증권은 HBM4가 범용 D램보다 약 3배의 웨이퍼 생산능력을 사용한다고 추정했다. HBM4는 여러 장의 D램 다이를 적층하고 첨단 패키징을 거쳐야 하므로, 제한된 웨이퍼 투입량과 후공정 역량이 HBM 중심으로 배분될수록 일반 서버 D램, PC용 D램, 모바일 D램에 남는 자원은 줄어들 수 있다.
이른바 ‘HBM의 범용 D램 잠식’은 단순히 공장 면적의 문제가 아니다. 첨단 공정 전환, TSV(실리콘관통전극) 기반 적층, 패키징, 검사·수율 안정화까지 포함한 복합적인 생산능력 배분의 문제다. HBM4 공급을 확대하려면 D램 다이 생산능력과 첨단 패키징 능력을 함께 확보해야 하는데, 어느 한쪽이 막혀도 최종 HBM 출하가 제한된다. 반대로 HBM 비중을 높이면 범용 D램의 비트 공급 증가율은 낮아질 수 있다.
시장조사업체 TrendForce도 이러한 병목을 별도로 확인했다. TrendForce는 2026년 2분기 일반 D램 계약가격이 전 분기보다 58~63%, 낸드플래시 계약가격은 70~75%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HBM과 서버용 제품으로 생산능력이 재배분되고, AI·데이터센터 수요가 확대되면서 메모리 가격 강세가 D램과 낸드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4 양산 경쟁을 서두를수록 시장에는 상반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HBM의 매출과 수익성은 좋아지지만, 고객사 관점에서는 서버용 D램·고용량 RDIMM·기업용 SSD의 조달단가와 리드타임이 함께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다. AI 인프라의 비용 구조가 GPU만이 아니라 메모리와 저장장치로 이동하는 이유다.
숫자로 확인되는 공급 압력
KB증권의 가장 공격적인 추정은 AI 인프라 투자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KB증권은 이 비중이 2025년 14%에서 2026년 40%, 2027년 57%로 뛰어 2년 만에 4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TrendForce의 전망은 더 강하다. 주요 글로벌 클라우드서비스제공자(CSP)의 설비투자가 2026년 전년 대비 98%, 2027년 다시 50%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가 CSP 설비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6년 47%, 2027년 68%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메모리가 AI 데이터센터의 주변 부품이 아니라 투자비를 좌우하는 핵심 원가 항목으로 변하고 있음을 뜻한다.
TrendForce는 서버 D램 계약가격이 2025년 하반기에 누적으로 64% 올랐고, 2026년에는 추가로 약 270%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용 SSD 가격도 2025년 하반기 약 35% 상승한 데 이어 2026년 누적으로 약 235% 더 오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는 전망치이며 실제 계약가격은 용량·사양·고객별 장기계약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AI발 수요가 D램을 넘어 낸드까지 확산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 산업 실적도 강한 가격·믹스 개선을 보여준다. TrendForce에 따르면 2026년 2분기 글로벌 D램 산업 매출은 전 분기 대비 59.5% 증가했다. 공급업체 재고는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늘어난 물량도 주로 서버 시장으로 배분돼 비트 출하 증가는 제한적이었다. 즉, 매출 확대가 단순 물량 급증보다 가격 상승과 고사양 제품 비중 확대의 결과였다는 의미다.
‘재평가’의 근거와 경계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가치 재평가 논리는 분명하다. 메모리 산업은 고정비 비중이 높고 가격 상승분이 매출과 이익에 빠르게 반영되는 구조다.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HBM, 서버 D램, 기업용 SSD 등 고사양 제품의 평균판매가격(ASP)이 오르면 매출 증가보다 이익 증가 폭이 더 커질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2분기 매출 79조3000억원, 영업이익 60조5000억원, 영업이익률 76%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AI 인프라 확대와 공급 제약에 따라 D램·낸드 가격이 동반 상승했고, HBM4는 2분기부터 양산 출하를 시작해 하반기 본격 램프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회사는 HBM뿐 아니라 에이전틱 AI 확산에 따른 서버 D램, 고성능·대용량 낸드 수요도 계속 확대될 것으로 봤다.
마이크론 역시 D램과 낸드 수요가 업계 공급을 유의미하게 웃돌고 있으며, 수급 긴장이 2027년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의 2026회계연도 3분기 매출은 414억6000만달러, GAAP 매출총이익률은 84.6%였다. 특정 한국 기업만의 낙관론이 아니라, 세계 메모리 3사의 공급 제약 인식이 대체로 같은 방향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메모리는 AI의 조연이 아니다
AI 인프라 경쟁의 병목은 이제 GPU 확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대규모 모델 학습과 추론에는 HBM이 필요하고, 이를 운용하는 서버에는 고용량 D램이, 축적되는 데이터에는 기업용 SSD가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가 커질수록 메모리와 저장장치의 용량·대역폭·전력효율은 동시에 중요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향후 HBM4 출하량만이 아니라, 고사양 D램과 낸드를 포함한 전체 메모리 포트폴리오에서 얼마나 높은 가격과 안정적인 공급계약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갈릴 전망이다. KB증권의 ‘물량 고갈’ 표현은 강한 전망이지만, TrendForce의 공급지연·가격상승 데이터와 글로벌 공급사의 수급 코멘트를 함께 놓고 보면, 메모리 산업이 과거의 단순한 경기순환을 넘어 AI 인프라의 전략적 병목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 자체는 상당한 근거를 갖는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