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지금 이순간에도 강남으로의 이주를 꿈꾸며 ‘강남 환상’ 혹은 '강남의 찐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비강남 사람들에게 진실된 모습을 알리고자 한다. 때론 강남을 우상화하고, 때론 강남을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강남의 가치가 급등해 비자를 받아야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강남VISA'라 명명한다. 나아가 강남과 강북간의 지역디바이드를 극복하는데 일조하고 이해의 폭을 넓혀 허상도 파헤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개인의 사적인 의견이니 오해없이 그냥 가볍게 즐겨주길 바란다.
명품 로고를 크게 내세우는 시대가 한풀 꺾이면서, 소재·봉제·재단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요소로 부를 드러내는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가 럭셔리 시장의 핵심 문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급 호텔 라운지나 글로벌 테크기업 최고경영자의 사진에서 종종 발견되는 옷이 있다. 커다란 로고도, 금빛 장식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모노그램도 없다. 색상은 회색·검은색·베이지·네이비처럼 얌전하고, 실루엣은 단순하다. 그런데 가격표를 확인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백 달러에서 수천 달러에 이르는 셔츠와 재킷, 캐시미어 코트가 등장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다. 패션·유통업계에서 이 용어는 대체로 눈에 띄는 로고와 과장된 장식을 줄이고, 소재의 품질·봉제·재단·착용감·희소성으로 고급성을 드러내는 소비와 스타일을 뜻한다. EDHEC 비즈니스스쿨은 콰이어트 럭셔리를 절제와 장인정신, 드러나지 않는 브랜딩을 강조하는 유형으로 설명하면서, 대형 로고와 주목성을 앞세운 ‘라우드 럭셔리’와 구분했다.
평범한 회색 티셔츠, 베이지색 캐시미어 니트, 검정색 야구모자처럼 보이지만 한 벌 가격이 수백만원을 훌쩍 넘는 이 스타일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부와 취향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내는 은밀한 신호다. 미니멀리즘이 물건의 수와 장식을 줄이는 미학이라면, 콰이어트 럭셔리는 줄어든 표면 아래에 가격과 생산자, 소재와 계보를 숨겨놓는 방식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로고를 제거하고도 누군가는 알아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가 소비의 사회적 효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콰이어트 럭셔리는 19세기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인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와 맞닿으면서도 방향을 바꾼다. 베블런식 소비가 대중에게 부와 지위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날의 비과시적 소비는 신호의 수신자를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한 소집단으로 좁힌다.
옷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수록 ‘우리끼리 아는 코드’라는 희소성이 커진다. 즉 콰이어트 럭셔리는 ‘부를 숨기는 패션’이 아니라, 부를 알아보는 사람을 선별하는 패션에 가깝다.
로고 대신 소재·재단으로 말한다…더 로우(The Row), 로로피아나(Loro Piana),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콰이어트 럭셔리는 직역하면 ‘조용한 사치’다. 패션계에서는 ‘스텔스 웰스(Stealth Wealth·은밀한 부)’ 혹은 ‘인콘스피큐어스 컨섬션(Inconspicuous Consumption·비과시적 소비)’과 유사한 뜻으로 쓰인다. 외부에 보이는 로고, 모노그램, 대형 금속 장식 대신 최고급 캐시미어·비큐나·실크·울, 정교한 봉제, 오랜 기간 입을 수 있는 절제된 실루엣을 앞세운다.
겉모습만으로는 고가 제품과 보급형 제품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 이 스타일의 핵심이다. 검은 블레이저 하나도 패스트패션 브랜드에서는 수십만원 이하에 살 수 있지만, 미국 럭셔리 브랜드 더 로우(The Row)의 블레이저는 온라인 럭셔리 유통채널에서 약 3250~3450달러 수준에 판매된다. 단순한 검은 재킷이라는 형태는 같지만, 원단의 밀도와 드레이프, 어깨선, 안감, 봉제, 생산량, 브랜드의 희소성까지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로로피아나(Loro Piana)의 니트웨어도 대표 사례다. 국내 소비자가 접근할 수 있는 유통 채널에서 캐시미어 스웨터는 약 126만9000원부터 200만원대, 일부 모델은 300만원대를 넘는다. 로고가 거의 보이지 않는 단색 니트 한 장이 고가인 이유는 캐시미어 원료와 직조, 가공, 디자인의 절제에 ‘보이지 않는 가격’을 매기는 데 있다.
패션 매체 보그는 콰이어트 럭셔리를 “부유층을 위한 위장복처럼 상상되는, 로고 없는 고품질·고가 의류”라고 정리한다.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 속 억만장자 가문 로이 가족이 대표적으로 보여준 검정 야구모자, 캐시미어 니트, 중성색 재킷은 이 미학의 교과서가 됐다. 극 중 켄들 로이가 착용한 로로피아나 야구모자는 겉으로는 평범한 검은 모자지만 가격은 525달러로 알려졌다.
일본의 경제·시사 매체 프레지던트온라인은 부유층 마케팅 전문가 니시다 리이치로의 분석을 빌려 이 변화를 더욱 날카롭게 표현했다. 니시다는 "현대 럭셔리시장의 표적이 ‘평생 쓸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려는 층으로 옮겨갔으며, 이와 별개로 ‘진짜 부자’는 다른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선호하는가…억만장자보다 ‘알아보는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들
공개 자료를 기준으로 콰이어트 럭셔리의 대표적 얼굴로 거론되는 인물은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기네스 팰트로, ‘석세션’의 로이 가문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의 취향 집단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는 실리콘밸리식 유니폼과 기능주의, 팰트로의 법정 패션은 셀러브리티 이미지 관리, ‘석세션’은 극 중 부유층의 계급 코드를 각각 보여준다. 제프 베이조스 역시 단순한 폴로셔츠나 무지에 가까운 캐주얼 차림으로 콰이어트 럭셔리의 사례처럼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공개 사진만으로는 실제 브랜드, 소재, 맞춤 여부, 가격을 확인하기 어렵다.
오히려 콰이어트 럭셔리를 선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게만 알아보이고 싶은 사람’에 가깝다. 이 소비는 사회적 연결감과 엘리트 집단에 대한 소속 욕구를 포함할 수 있다. 옷은 자기만족의 도구인 동시에 관계망의 입장권이다.
“평범한 티셔츠”를 입는 저커버그와 베이조스
메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무지 티셔츠는 콰이어트 럭셔리의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례다. 저커버그는 오랫동안 매일 비슷한 회색 티셔츠와 후드티를 입는 모습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티셔츠는 단순한 기본템이 아니었다. 패션 전문지 W매거진과 CNBC 보도에 따르면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는 이탈리아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에 맞춤 주문한 제품이며, 한 장에 약 300달러 이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캐시미어의 왕’으로 불리는 브랜드이자, 실리콘밸리 고액자산가들이 선호하는 이름으로 자주 언급된다. CNBC는 저커버그뿐 아니라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이 브랜드를 즐겨 찾는 기술업계 거물로 소개했다. 핵심은 이들이 특정 로고를 소비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을 입기보다, 편안한 소재와 정제된 핏, 제한적 유통, 개인 주문 같은 요소에 비용을 지불한다는 데 있다.
럭셔리 시장 트렌드의 변화…로고와 문화자본 작동방식
이 현상은 럭셔리 시장의 소비층 변화와 맞물린다. 베인앤드컴퍼니와 이탈리아 럭셔리 협회 알타감마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개인용 럭셔리 상품 시장은 2024년 3640억유로에서 2025년 3580억유로로 약 2% 감소했다. 반면 고액 지출 고객의 시장 비중은 2019년 30%였던 880억유로에서 2024년 45%인 1650억유로로 커졌고, 2025년에도 약 46~47%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분석됐다.
즉 시장의 ‘입문자’는 줄고, 큰돈을 쓰는 핵심 고객의 영향력은 커진 것이다. 베인은 전 세계 럭셔리 소비자 수가 2022년 약 4억명에서 2025년 약 3억4000만명으로 감소했다고 추산했다. 브랜드의 가격 인상과 거시경제 불확실성 속에서, 향수·지갑·로고 가방처럼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았던 상품을 사던 소비자들이 이탈한 반면 초고가 소비자는 수요를 떠받치는 구조가 선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로고는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명품의 대중화 초기에는 로고가 “나는 이 브랜드를 살 수 있다”는 즉각적이고 알아보기 쉬운 표식이었다. 그러나 로고 제품이 대량 유통되고, 리셀 시장과 SNS를 통해 브랜드 코드가 빠르게 복제되기 시작하자 이미 부를 보유한 소비자에게는 오히려 차별화 효용이 줄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표식이 아니라, 소재와 핏, 생산지, 장인의 기술, 오래된 브랜드의 역사처럼 지식이 있어야만 판독되는 신호다.
학계에서 말하는 문화자본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은 단순히 돈이 많다는 사실보다 예술·문화·상품에 관한 지식, 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취향과 판별 능력이 사회적 차이를 만든다고 본다. 관련 연구는 문화자본이 높은 소비자일수록 즉각적으로 읽히는 화려한 신호보다, 봉제·실루엣·소재·브랜드 유래처럼 비가시적 단서를 통해 취향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즉 콰이어트 럭셔리는 ‘돈이 많아서 로고를 안 쓴다’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가격의 가시성”에서 “취향의 판별력”으로 이동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콰이어트 럭셔리 유행시킨 드라마·재판·틱톡의 결정적 3장면
콰이어트 럭셔리는 부유층의 오래된 소비 습관이지만, 2023년 대중적 유행어가 된 데에는 대중문화와 SNS의 역할이 컸다. 구글 트렌드 기준으로 ‘quiet luxury’ 검색량은 2023년 1년 사이 614% 급증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 가지 장면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첫째 장면은 HBO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으로 콰이어트 럭셔리를 대중문화의 문법으로 번역한 작품이다. 돈이 많을수록 로고를 지우고, 캐시미어·고급 울·중성색 재단으로 계급을 드러낸다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드라마 W 매거진은 로이 가문의 의상을 ‘quiet 또는 coded luxury’라고 부르며, 겉으로는 낮은 톤의 기본 아이템이지만 매우 부유하거나 비과시적 패션에 정통한 사람만 브랜드와 가격을 알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W가 정리한 ‘석세션’ 속 의상 가격은 켄달 로이가 입은 로로피아나(Loro Piana) 앙드레 셔츠는 580달러, 로로피아나 캐시미어 혼방 코트는 8895달러였다. 브리오니(Brioni) 스트라이프 울 수트는 5800달러, 흰 셔츠는 790달러로 소개됐다. 화면에서는 ‘잘 만든 셔츠’처럼 보이지만, 가격을 알고 나면 그 평범함 자체가 계급적 장치였음을 알게 된다.
둘째 장면은 기네스 팰트로가 2023년 스키 충돌 민사재판에 출석하며 크림색 니트, 넓은 바지, 트렌치코트, 셀린 부츠 등으로 구성된 절제된 옷차림을 선보였다. 일부 매체는 특정 날의 착장을 약 6만7220달러로 추정했다. 법정이라는 긴장된 공간에서 ‘보여주지 않음’이 오히려 막대한 자본력을 암시하는 장면이 된 셈이다.
셋째 장면은 소피아 리치 그레인지의 2023년 프랑스 남부 결혼식. 그녀는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올드 머니’와 ‘콰이어트 럭셔리’를 일상 언어로 만들었다. 그의 첫 ‘겟 레디 위드 미(Get Ready With Me)’ 영상은 890만 조회를 기록했고, 결혼 기간 샤넬 착장이 창출한 미디어 임팩트 가치는 약 127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 과정에는 역설도 있다. ‘조용함’을 표방한 스타일이 소셜미디어에서 대량으로 복제되고, 해시태그로 유통되면서 결코 조용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틱톡의 #quietluxury 관련 영상은 약 400억 회에 가까운 조회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소피아 리치 그레인지 역시 자신의 결혼식 이후 틱톡에서 ‘quiet luxury’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며, 자신이 선호하는 표현은 “시대를 타지 않는(timeless)” 스타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석세션’이 보여준 것은 옷이 아니라 암호…조용함은 겸손이 아니라 고도의 언어
콰이어트 럭셔리를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부자의 취향’이라고만 해석하면 절반만 맞다. 더 정확한 표현은 남들의 시선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선을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소비다. 로고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셔츠지만, 소재와 브랜드의 맥락을 아는 사람에게는 경제력과 취향, 교육과 네트워크를 동시에 암시한다.
콰이어트 럭셔리는 로고를 없앤 패션이 아니다. 그것은 로고가 담당하던 사회적 신호를 소재, 실루엣, 가격, 생산지, 브랜드 역사, 착용자의 지식으로 분산시킨 패션이다. 큰 글씨의 브랜드명이 사라진 자리에 더 복잡한 문장이 들어선 셈이다.
이 미학은 한편으로 과시적 소비의 피로와 경기 불안, 패스트패션에 대한 반작용을 반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럭셔리 브랜드가 고객 수 감소와 최상위 소비자 집중에 대응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시장의 외연이 줄어들수록 브랜드는 ‘누구나 알아보는 로고’보다 ‘소수가 해독하는 품질’을 내세우려 한다.
결국 질문은 ‘로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누가 만들었고, 무엇으로 만들었으며, 얼마나 오래 쓰고, 누가 그 가치를 알아보도록 설계됐는가다. 콰이어트 럭셔리의 조용한 표면 아래에는 소비의 철학과 계급의 언어, 마케팅의 계산이 동시에 흐른다. 평범해 보이는 티셔츠가 비싼 이유는 티셔츠가 특별해서만이 아니다. 그 평범함을 특별하다고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