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은주 기자] 한국 암호화폐 시장이 개인 매매 중심 구조에서 법인·기관 참여와 토큰화 금융 인프라 중심 구조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국은 기업의 디지털 자산 거래 접근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중앙은행 역시 디지털 화폐 파일럿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만 '기업의 가상자산 계좌 개설’은 확정된 전면 허용 정책이 아니라 금융위원회가 민관 태스크포스에서 세부 기준을 논의 중인 단계여서, 투자한도·공시·수탁·회계처리 등 후속 규율의 확정 여부가 시장 전환의 실제 속도를 가를 전망이다.
3,500개 기업 대상 법인 계좌 개설 추진
팩트블록(FactBlock) CEO이자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 조직위원장인 박앤드류는 Bitcoin.com News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금융위원회가 약 3,500개의 상장사 및 등록 전문 투자자를 대상으로 법인 가상자산 계좌를 개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이 올해 1월 9년간 지속된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 금지를 해제한 결정에 이은 조치로, 당시 시가총액 상위 20개 암호화폐에 한해 주주 자본의 5% 이내로 투자를 허용한 바 있다.
국회는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토큰화된 실물 자산과 증권형 토큰을 단일 법적 체계 아래 통합 규율하게 됐다. 박 대표는 이러한 흐름을 개인 투자자 중심의 거래에서 기관 중심의 디지털 금융으로의 전환으로 설명하며,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토큰 가격이나 거래소보다 수탁, 토큰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프라에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법인 시장의 문턱
금융위원회는 2025년 2월 법인의 가상자산시장 참여를 단계적으로 허용하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1단계는 비영리법인과 가상자산거래소에 대한 실명계좌 발급 및 보유 가상자산의 매각 목적 거래를 중심으로 하고, 2단계는 상장법인과 등록 전문투자법인에 투자·재무 목적의 실명계좌를 시범 허용하는 구조다. 시장에서 거론되는 대상은 상장사 약 2,500개와 전문투자법인 약 1,000개를 합친 약 3,500개 법인이다.
그러나 숫자가 곧 실제 투자자 수를 뜻하지는 않는다. 3,500개는 계좌 개설 및 시범 참여의 잠재적 범위에 가깝고, 각 기업의 이사회 결의, 내부통제 체계, 감사 대응, 공시 판단, 거래소·은행의 고객확인 절차 등을 통과해야 실제 거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금융회사는 현 단계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일반 비상장 영리법인의 참여는 시장 여건과 후속 입법을 보며 별도로 검토하는 방식으로 남아 있다.
핵심은 당국이 아직 세부 가이드라인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연간 투자 또는 입금 한도를 자기자본의 5% 이내로 제한하고, 국내 주요 원화거래소 기준 시가총액 상위 20개 가상자산에 투자 대상을 한정하는 방안이 논의됐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금융위원회는 2026년 1월 전문투자법인의 투자한도와 투자 대상 등 구체적 내용은 “확정된 바 없다”고 공식 해명했다. 즉, ‘자기자본 5%·상위 20종목’은 확정 규정이 아니라 검토안 또는 보도된 초안으로 구분해야 한다.
투기시장서 금융 인프라로
법인 참여 확대가 의미하는 변화는 단순히 기업의 비트코인 매수가 늘어나는 데 있지 않다. 기관 자금은 거래소 매매보다 수탁, 원화 입출금, 회계·감사, 위험관리, 내부통제, 공시, 시장감시 등 금융 인프라의 제도화를 요구한다. 법인 계좌가 본격 도입되면 가상자산사업자는 개인 고객 유치 경쟁을 넘어 기관급 고객확인과 이상거래 감시, 분리보관, 수탁 서비스를 갖춰야 한다.
상장사에는 더 높은 책임이 따른다. 가상자산 가격 변동이 재무제표와 손익, 현금흐름, 주가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자기자본의 3% 이상 디지털자산 투자 시 공시를 요구하는 방안도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역시 정부가 확정하지 않은 논의안이다.
법인 진입은 유동성 확대라는 긍정 효과와 함께 기업 재무의 변동성 확대라는 비용을 동시에 낳는다. 예를 들어 자기자본 1조원 기업에 5% 한도가 적용된다면 최대 500억원의 가상자산 익스포저가 가능해진다. 이 경우 가격 변동은 단순한 투자 손익을 넘어 감손 인식, 평가 기준, 공시 적정성, 감사 의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정책 성공의 기준은 ‘몇 개 법인이 계좌를 열었는가’보다 기업의 투자 의사결정과 투자자 보호가 얼마나 투명하게 작동하는가에 있어야 한다.
토큰증권은 별도 축
가상자산 법인계좌 논의와 토큰증권 제도화는 같은 디지털금융 전환 흐름에 놓여 있지만, 법적 성격은 분명히 다르다. 가상자산은 거래·보관·자금세탁방지 규율이 중심인 반면, 토큰증권은 기존 자본시장법상 증권을 분산원장 기술로 발행·관리·유통하는 제도다.
국회는 2026년 1월 15일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분산원장 기반 토큰증권 발행 인프라를 전자증권법 체계에 편입하고, 증권사를 통한 투자계약증권 유통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정부는 분산원장 기반 증권계좌 관리 인프라와 투자자보호 세부 제도를 정비한 뒤, 공포 1년 후인 2027년 1월께 시행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부동산·미술품·매출채권·비상장 지분 등 실물 또는 권리 기반 자산을 쪼개 유통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다. 다만 ‘토큰화’가 곧 유동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발행 자산의 가치평가, 권리관계, 투자자 적합성, 유통시장 호가, 수탁·결제 안전성이 함께 갖춰져야 실제 시장이 형성된다.
한강 프로젝트의 실험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 2단계는 민간 가상자산과 구별되는 지급결제 인프라 실험이다. 구조는 한국은행이 기관용 디지털화폐를 공급하고, 참여 은행이 이를 기반으로 예금토큰을 발행해 고객 결제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중앙은행이 일반 이용자에게 직접 지갑을 제공하는 소매형 CBDC와는 다른 하이브리드형 모델에 가깝다.
한국은행은 2026년 3월 프로젝트 한강 2단계에 착수했고, 참여 은행은 기존 7곳에서 9곳으로 늘었다. 기존 참여 은행은 KB국민·신한·우리·하나·IBK기업·NH농협·BNK부산은행이며, BNK경남은행과 iM뱅크가 새로 참여했다. 2단계에서는 개인 간 송금과 생체인증 등 기능을 더하고, 소상공인과 대형 사업체를 포함한 실사용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사업성은 결제비용 절감과 가맹점 확대에 달려 있다. 카드 결제 수수료 부담이 큰 소상공인과 대형 사업체를 우선 사용처로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카카오뱅크·케이뱅크·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 3곳은 인프라 투자 대비 수익성 등을 이유로 2단계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기술 실증과 상용서비스 간 간극이 여전히 크다는 신호다.
전환의 조건
한국은 법인 가상자산 계좌, 토큰증권 제도, 은행 예금토큰 실험을 병행하면서 아시아 디지털금융 경쟁의 제도 기반을 넓히고 있다. 결국 한국 시장은 ‘개인 투자자의 고빈도 매매시장’에서 ‘법인 자금과 은행·증권 인프라가 결합한 디지털 자본시장’으로 갈림길에 섰다.
약 3,500개 법인 대상 계좌 허용 구상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기관화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규제의 명확성, 기업의 책임 있는 참여, 금융회사의 위험관리 능력이 맞물릴 때에만 한국은 홍콩·싱가포르와의 디지털자산 금융 허브 경쟁에서 실질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