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전 세계 AI 기업들이 익명의 중개업체를 통해 수백만 권의 실물 책을 은밀히 사들여 파쇄하는 '파괴적 스캐닝(Destructive Scanning)' 관행이 법원 문서와 The Washington Post, Yahoo! Finance, Breitbart, International Business Times UK의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이는 인터넷상의 양질 텍스트가 고갈되는 상황에서, AI가 생성한 콘텐츠에 오염되지 않은 고품질의 인간 저술 텍스트를 차세대 AI 모델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다. 즉 AI 오염 없는 '깨끗한' 학습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산업 전반의 자구책으로, 문화유산 훼손 논란과 함께 저작권법의 새로운 지형을 만들고 있다.
이처럼 AI 기업들이 학습 데이터 확보를 위해 실물 책을 파쇄하는 관행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유되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2200여 년 전 사상 통제를 위해 책을 불태웠던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데이터 독점을 위해 책을 파쇄하는 빅테크의 행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로젝트 파나마의 전모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월 27일 법원에 공개된 문서를 근거로 앤트로픽(Anthropic)이 2024년부터 수천만 달러를 투입해 '프로젝트 파나마(Project Panama)'를 가동했다고 보도했다. 내부 기획 문서에는 "프로젝트 파나마는 전 세계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하려는 시도"라며 "이 작업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앤트로픽은 중고서점과 재정난에 처한 도서관 등에서 책을 대량 확보한 뒤, 외부 업체를 고용해 유압식 절단기로 제본을 잘라내고 고속 시트피드 스캐너로 페이지를 디지털화했으며, 스캔이 끝난 종이는 재활용 업체로 넘겼다. 회사는 한 번에 50만~200만 권을 스캔할 수 있는 업체와 사후 수거를 담당할 재활용 업체까지 별도로 섭외한 것으로 드러났다.
법적 판결과 2조원 합의금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은 2025년 6월 앤트로픽의 이 같은 스캐닝 방식이 저작권법상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원본 실물이 파쇄돼 한 번에 오직 하나의 사본(디지털판)만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근거로 이를 "전형적인 변형적 이용"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는 합법적으로 구매한 책에 한정된 판단으로, 별도로 진행된 저작권 침해 소송(Bartz v. Anthropic)에서는 작가들이 앤트로픽이 불법 복제된 도서를 학습에 사용했다고 주장해 미국 저작권 소송 사상 최대 규모인 15억 달러(약 2조원) 합의가 성립됐다. 국내 출판계는 이 판결에 대해 "책 한 권 값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얻는다면 지식 생태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산업화된 2차 시장, 최대 100만 권 대량 주문
이 관행은 앤트로픽 한 곳에 그치지 않고 업계 전반의 관행으로 확산됐다. 도서 메타데이터 업체 ISBNdb는 최대 100만 권 단위의 대량 주문, 구매자 익명성 보장, 비밀유지계약(NDA) 지원까지 갖춘 'LLM 학습용 도서 조달' 서비스를 홍보했다가 관련 웹페이지를 삭제하고 이를 '테스트'였다고 해명했다.
네덜란드 하를럼의 고서적상 피터르 더 프리스는 "2077AI"라는 업체로부터 2020~2021년 출간된 옥스퍼드대출판부, 엘스비어, 와일리 등의 학술서 3,001종의 ISBN이 담긴 스프레드시트와 함께 중국행 배송 요청을 받았으며, 이는 전 세계 수백 명의 희귀서적상이 유사한 방식으로 접촉당한 글로벌 조달망의 일부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라지는 인류의 마지막 실물, 되돌릴 수 없는 손실
전문가들과 고서적상들은 파쇄 대상에 절판본·외국어 서적·희귀본이 포함돼 있으며, 일부는 현존하는 마지막 실물 사본이라는 점에서 위험성을 지적한다. 특히 18세기에 출판돼 현재 남아있는 마지막 사본이 파쇄된 경우, 법원의 '공정 이용' 판단과 무관하게 비가역적인 문화유산 훼손이 발생한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런 관행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도 지식 생태계에 대한 국제적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목적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지식의 물리적 소멸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사상 통제와 체제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서적을 불태웠다면, 오늘날 앤트로픽 등 AI 기업들은 상업적 이익과 데이터 독점을 위해 책을 파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목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실물 지식 매체의 영구적 소멸'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갖는다.
법원 문서에 따르면 앤트로픽의 내부 기획 문서는 프로젝트 파나마를 "전 세계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하려는 시도"라고 명시했으며, 이 작업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는 대목까지 담겨 있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생산이 아니라, 원본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없애면서까지 지식을 독점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분서갱유의 '봉쇄적 지식 통제' 논리와 겹쳐진다.
현대판 '갱유(坑儒)'는 없는가…지식 생산자의 침묵당하는 권리
분서갱유의 또 다른 축인 '갱유'는 사상가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오늘날의 버전은 물리적 살해가 아니라, 저자와 출판사, 지식 생산자들이 자신의 창작물이 파쇄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동의나 보상 없이 배제되는 구조로 나타난다. 출판계는 미국 법원의 공정 이용 판결에 대해 "책 한 권 값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얻는다면 지식 생태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이는 창작자의 권리가 법적·경제적으로 무력화되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분서갱유가 역사적으로 비판받는 핵심 이유는 '복원 불가능성'에 있다. 오늘날 파쇄되는 책 중에도 절판본, 외국어 서적, 희귀본이 포함돼 있으며 일부는 현존하는 마지막 실물 사본이라는 점에서 이 은유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법원이 디지털 사본 하나만 남기는 방식을 '변형적 이용'으로 인정했다 해도, 종이에 남은 초판본의 물성, 여백에 적힌 메모, 제본 방식 같은 물리적 정보는 스캔 과정에서 영구히 사라진다. 이는 불로 태운 것과 절단기로 자른 것의 '수단'만 다를 뿐, 실물 지식 매체의 소멸이라는 '결과'는 동일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