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램프' 레스토랑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 글로벌 빅테크 수장들과 가진 만찬은 단순한 의전성 회동이 아니었다. 피시앤칩스와 맥주로 채워진 이 해변 테이블 위에서, 한국은 반도체 공급국을 넘어 '소버린 AI(자국 주도 AI)' 국가로 도약하겠다는 선언을 내놓았다.
깐부 외교, 시즌2가 되다
지난해 젠슨 황 CEO가 서울 '깐부 치킨'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 회동을 가졌던 장면이 이번엔 태평양을 건너 미국판으로 재연됐다. 강유청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이번 자리는 격의 없이 대화하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고 설명했으며, 실제로 메뉴는 칼라마리 튀김·크랩케이크·클램차우더 등 캘리포니아 로컬 음식으로 채워졌다.
흥미로운 지점은 '깐부'라는 단어의 문화적 궤적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원래 목숨을 건 생존게임 속 '한 편'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국가 정상과 글로벌 빅테크 수장이 맥주잔을 부딪히는 외교적 은유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언어가 서브컬처에서 국정 담론으로 편입되는 이 과정 자체가, K-콘텐츠의 소프트파워가 실제 정치·경제 협상 테이블의 '공용어'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대통령이 "'우리는'이라고 외치면 '식구다'라고 해달라"고 건배사를 제안하자 황 CEO가 "위 아 패밀리(We are family)"로 화답한 장면도 단순한 립서비스로 읽히지 않는다. 한국어 '식구(食口)'는 문자 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입'을 뜻하는데, 이는 서구의 계약 중심 비즈니스 관계와 대비되는 '관계 자본주의'적 접근을 상징한다. 국가가 기업을 규제 대상이 아니라 밥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호명하는 이 화법은, 산업정책이 딱딱한 명령이 아니라 정서적 유대를 통해 작동한다는 한국 특유의 통치 문법을 드러낸다.
만찬장 뒤 오간 숫자들
가벼운 농담 뒤에는 묵직한 협상이 있었다. 젠슨 황 CEO는 SK그룹과 5000억 달러(약 690조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언급했고, 엔비디아는 네이버 투자와 현대차 자율주행, 한국형 거대언어모델(LLM) 개발까지 다각도 협력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동을 통해 95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협력 논의가 오간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젠슨 황 CEO는 한발 더 나아가 "엔비디아의 선도적 AI 연구원들이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으로 이주할 계획"이라며 "카이스트와 협력해 '대한민국 LLM'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혹 탄 브로드컴 CEO 역시 한국의 소버린 AI 구축 협력 의지를 밝히며 삼성전자와의 양해각서(MOU) 체결 계획을 언급했고, 화상으로 참석한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도 "한국의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앞으로 수년간 지속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별도 자리에서 "AI 혁명은 한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남겼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오픈AI와 앤트로픽처럼 실리콘밸리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앙숙' 기업들, 그리고 엔비디아와 브로드컴 같은 경쟁사들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이슈 앞에서 동시에 모였다는 점이다. 매체들은 이를 두고 "K-반도체 없이는 AI도 없다"는 산업 논리가 경쟁사 간 견제심리보다 우위에 섰다고 분석했다.
"한국만의 AI 모델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조언
비공개 만찬에서 CEO들이 던진 메시지는 얼핏 역설적으로 들린다. 자사 AI 기술을 팔아야 할 빅테크 수장들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AI 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한국만의 AI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은 이미 글로벌 3강 수준이며, 충분한 투자가 이뤄지면 단기간에 최상급 프론티어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의 이면에는 냉정한 산업 논리가 있다. 자국 AI 생태계가 강할수록 GPU·데이터센터·전력 등 하드웨어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빅테크 입장에서 '한국의 AI 독립'은 자사 매출 확대와 상충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는 '의존을 통한 자립의 역설' 즉 강대국·거대기업이 약소 파트너의 주권적 역량 강화를 권유함으로써 더 깊은 상호의존 구조를 설계하는 21세기형 기술 지정학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과 AI, 숫자로 보는 배경
이 대통령이 만찬에서 "기업인들 덕에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수십 년만의 최고 실적을 냈다"고 언급한 배경에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뒷받침한다. 한국은행과 IMF 공동연구는 AI를 적극 도입할 경우 향후 10~20년간 한국 GDP가 4.2~12.6% 높아지고 총요소생산성은 1.1~3.2% 개선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반면 국내 근로자의 27%는 AI로 인해 대체되거나 소득이 감소할 위험군으로 분류돼, AI가 '기회이자 위기'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도 함께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최근 분석은 더 정밀하다. AI 도입으로 노동생산성이 개선되면 향후 20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이 기본 시나리오(1.21%) 대비 최대 0.42%포인트(1.63%) 높아지고, 국민연금 고갈 시점도 최대 5년(2062년→2067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 대통령의 '깐부 외교'가 단순 이벤트가 아니라,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잠재성장률 붕괴를 AI 산업 유치로 완충하려는 국가 전략의 연장선임을 보여준다.
만찬 테이블 위의 인간적 순간들
숫자와 전략 이면에는 인간적인 장면도 있었다. 이 대통령이 젠슨 황 CEO에게 "용산 전자상가를 다니던 젊은 시절이 큰 에너지원이 됐느냐"고 묻자 엄지를 치켜세우며 화답한 대목은, 대만계 이민자 출신 CEO의 성장 서사와 한국 전자산업의 상징적 공간(용산)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배경훈 부총리가 식사비를 내겠다고 하자 황 CEO가 "맥주를 더 사라"고 받아치고, 이 대통령이 "공무원이라서 안 된다"고 농담한 장면 역시 권력 서열이 뚜렷한 정상외교 자리에서 보기 드문 수평적 유머였다.
이런 스몰토크는 결코 부수적이지 않다. 국제정치학에서 '개인적 신뢰(personal rapport)'는 종종 공식 협정보다 먼저 실질적 협력의 물꼬를 트는 촉매로 작용한다. 이번 회동에서 오간 농담과 술잔이 향후 수백조 원대 반도체·AI 투자 계약서의 '서문'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