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한국의 문화재(현재는 '국가유산'으로 명칭 변경)는 국보·보물·사적 외에도 명승, 천연기념물, 국가무형유산, 국가민속문화유산 등 총 7가지 유형으로 국가지정문화재를 구성하고 있다. 이 밖에 시·도지정문화재와 등록문화재, 비지정문화재까지 포함하면 훨씬 다층적인 분류체계를 갖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7개 유형
국가유산청장이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하는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보물·사적·명승·천연기념물·국가무형유산·국가민속문화유산 등 7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5000점 이상에 달했다.
이 중 국보(보물 중 역사·학술·예술·기술적 가치가 매우 큰 것), 보물(유형문화재 중 가치가 큰 것), 사적(절터·궁터·무덤 등 역사·학술적 가치가 큰 유적지), 명승(경관적·경치적 가치가 큰 자연·인문 경관), 천연기념물(동물·식물·지질·광물 중 학술적 가치가 큰 것),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 의식주·생업·신앙·민속 등 국민생활 변화를 보여주는 것)로 7개 유형 중 보물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다.

문화재의 분류…지정주체·절차 3부류, 형태에 따른 4대 분류
문화재는 지정 주체와 절차에 따라 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 비지정문화재로도 나뉜다. 지정문화재는 국가가 강한 규제와 보호를 통해 영구 보존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국가지정문화재·시도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세 단계로 세분된다.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부터 6·25 전쟁 전후 시기의 근대문화유산 중 서울 화동 옛 경기고교 건물처럼 보존가치가 큰 건조물이나 시설물을 가리킨다.
문화재보호법상 가장 상위 개념 분류는 형태의 유무에 따라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로 나뉘며, 국가유산청은 실무적으로 이를 시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문화재의 4개 범주로 세분해 운영한다. 유형문화재는 건축물·서적·회화·조각·공예품처럼 형태가 있는 소산을, 무형문화재는 승무·탈춤·판소리 등 세대를 통해 전승된 공연·기술·지식·관습을 뜻하며, 기념물은 절터·궁터·무덤·사적지·경관·동식물을, 민속문화재는 국민생활 변화를 보여주는 가구·기구·의복 등을 포괄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는 시·도지정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더라도 보존가치가 인정되는 문화재는 각 시·도지사가 조례에 따라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문화재 등 4개 유형으로 지정하며, 이를 '지방문화재'라고도 부른다. 이보다 한 단계 아래에는 시·도지사가 향토문화 보존을 위해 별도로 지정하는 '문화재자료'가 있으며, 아직 어떤 지정도 받지 못했지만 매장문화재나 일반동산문화재처럼 보존가치가 있는 것은 '비지정문화재'로 분류된다.
이처럼 한국의 문화재 체계는 국보·보물이라는 대표적 카테고리 외에도 유형·무형·자연·생활사적 가치를 아우르는 7~8개의 세분 범주와 지정 주체별 3단계 위계를 갖춘 정교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 세계유산 1호, 석굴암·불국사의 상징성
한국은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 3건을 동시에 등재시켰으며, 이 가운데 석굴암·불국사가 통상 한국 최초의 세계유산으로 꼽힌다. 흥미롭게도 이 세 유산은 각각 삼국·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대표해 한국사의 시대별 정수를 고르게 아우르도록 의도적으로 구성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한국의 세계유산은 창덕궁·수원 화성(1997년)부터 최근 2025년 등재된 반구천의 암각화까지 총 17건으로 늘었으며, 이번 부산 회의에서는 한국의 갯벌 확대 등재를 포함한 33건의 심의가 진행 중이다. 단일 국가에서 30여 년간 문화유산 대국으로 성장한 궤적은, 유산 보호가 곧 국가 정체성 구축의 여정이었음을 방증한다.
국보·보물·사적 1호, 사라진 '서열'의 역사
한국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1호' 논쟁은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보물 1호 흥인지문(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을 둘러싼 것이다. 이 지정번호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당시 도입됐는데, 그 뿌리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매긴 문화재 등급 목록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불편한 진실'로 지목돼 왔다.
이후 논란은 결국 2021년 제도 개편으로 귀결됐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지정번호가 문화재의 가치를 서열화한다는 비판을 수용해,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보·보물·사적·천연기념물 등 모든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번호를 공문서·누리집·교과서·안내판 등에서 삭제하고 내부 관리용으로만 남기기로 했다.
2016년 한글 창제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격상시키자는 시민단체 청원이 제기됐을 때도, 여론조사에서 숭례문 유지 의견이 67.6%로 다수를 차지하며 논쟁은 일단 봉합됐지만, 결국 5년 뒤 '숫자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근본적 해법을 찾았다.
국보·보물처럼 사적·명승·천연기념물·국가무형유산에도 각각 '1호'가 존재하며, 이 역시 등재 순서일 뿐 가치의 우열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 공통된 특징이다.
사적 1호, 경주 포석정지·명승 1호, 강릉 소금강…천연기념물 1호,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
사적 제1호는 경북 경주에 있는 포석정지로, 신라 왕실이 연회를 열던 정원 유적이다. 신라 55대 경애왕이 견훤의 침입 당시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다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국가 제사와 관련된 의례 공간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참고로 사적 지정번호 체계는 일제강점기 '고적' 제도에서 유래했으며, 고적 1호도 동일하게 경주 포석정이었다.
명승 제1호는 강원 강릉시 오대산국립공원 동쪽에 자리한 '명주 청학동 소금강'으로, 1970년 지정됐다. 굽이치는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금강산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에도 강원권 대표 트레킹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호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측백나무숲으로 1962년 12월 3일 지정됐다. 원래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졌던 측백나무가 한반도 대구·경북 영양·충북 단양 등지에서도 자생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이 지역이 한국 자생지의 최남단 한계선으로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가무형유산(중요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국가민속문화유산 1호, 덕온공주당의
국가무형유산 제1호는 종묘제례악으로, 1964년 12월 7일 지정됐다. 조선 세종 17년(1435년) 창제돼 세조 대부터 종묘 제례에 쓰이기 시작한 궁중음악으로, 문덕을 기리는 '보태평' 11곡과 무공을 기리는 '정대업' 11곡, 진찬악으로 구성돼 있으며 편종·편경·당피리·대금·해금 등 아악기·당악기·향악기가 함께 연주된다. 종묘제례악은 600년 가까이 원형을 유지한 채 전승돼온 세계 유일의 의식음악으로 평가받으며,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된 뒤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정식 등재됐다.
국가민속문화유산(옛 중요민속자료·중요민속문화재) 1호는 '덕온공주당의(德溫公主唐衣)'이다. 이는 조선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여성 예복)다. 또 최초로 '민속마을'로 지정된 사례는 1984년 1월 지정된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며, 이후 제주 성읍마을·경주 양동마을·고성 왕곡마을 등이 뒤따라 지정됐다.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 로 명확히 확인된다.
숫자를 넘어선 유산의 가치
이처럼 국가지정문화재 7개 유형의 '1호'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건축물(숭례문·흥인지문)부터 유적지(포석정), 자연경관(소금강), 생물자원(측백나무숲), 무형의 소리와 몸짓(종묘제례악)까지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확인된다. 앞선 국보·보물 1호 논쟁에서 보았듯, 이 숫자들 역시 서열이 아니라 행정적 등재 순서일 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 '1호 해체'의 역사는 문화재 행정이 권위주의적 서열 문화에서 벗어나 유산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궤적을 보여준다. 실제로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문화재를 서열화하는 사회적 인식과 잦은 변경 요구·논쟁을 불식하기 위해 관리번호로 운영을 개선한다"고 밝혔다. 이는 문화유산이 순위가 아니라 저마다의 서사와 맥락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문명사적 성찰을 담고 있다.
부산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는 지금, 아헨 대성당에서 석굴암까지, 숭례문에서 훈민정음까지 이어지는 '1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인류가 유산을 대하는 태도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숫자는 편의를 위한 장치일 뿐, 유산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담고 있는 시대의 정신과 기술,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 사람들의 의지에 있다는 점을 이번 회의는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