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흥국자산운용(대표 이두복)이 SK하이닉스 이사회를 향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대규모 투자 발표 절차를 정면으로 비판한 주주서한을 보냈다가 하루 만에 철회하면서, 그 배경을 둘러싼 논란이 자본시장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서한에 담긴 세 가지 쟁점
흥국운용 주식운용본부는 지난 7월 8일 오후 SK하이닉스 IR 담당자에게 'SK하이닉스 이사회에 보내는 서한: 일반주주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발송했다. 서한은 크게 세 가지를 지적했다.
먼저 최태원 회장(SK하이닉스 미등기임원, 최대주주의 최대주주인 SK㈜ 대표)이 정부 수반과 함께 서남권(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400조원을 포함한 총 1100조원 규모 중장기 투자 계획을 이사회 승인 전에 대외 발표한 점이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는 글로벌 거버넌스 원칙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SK하이닉스가 6월 29일 공시한 장래사업·경영계획에는 '이사회 결의일'이 공란으로 남아 있었고, 회사는 "향후 이사회 승인을 거쳐 확정되는 시점에 추가 공시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두 번째는 주주환원 정책 후퇴다. 서한은 반도체 업황 호황으로 현금흐름이 크게 개선됐음에도 임직원 보상과 투자만 발표되고 주주 몫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경쟁사 마이크론이 최근 잉여현금흐름(FCF) 전액을 주주환원에 쓰겠다고 발표한 반면 SK하이닉스는 올해 배당성향이 오히려 후퇴했다고 비판했다.
세 번째로는 SK하이닉스가 준비 중인 장기공급계약(LTA)과 관련해 계열사 간 이해상충 가능성까지 문제로 제기했다.
하루 만에 뒤집힌 입장, 그 배경
문제는 흥국운용이 서한 발송 이튿날인 9일 오후 "회사 공식 입장이 아닌 주식운용본부장 개인 의견"이라며 전격 철회했다는 점이다. 회사는 "서한 내용을 확인한 결과 회사의 입장과 다를 뿐만 아니라 일부 내용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철회했다"고 밝혔다.
자본시장 및 금융업계에서는 회사 소속 본부장이 정식 이메일로 발송한 문건을 하루 만에 '개인 의견'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업계 시각은 대체로 서한 내용 자체의 설득력을 인정하는 쪽이다. 실제로 SK하이닉스가 이사회 결의일을 비워둔 채 대규모 투자를 공시한 사실은 글로벌 거버넌스 기준에서 충분히 논란이 될 소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한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대기업과 공개적으로 각을 세우는 모양새에 부담을 느껴 급히 발을 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번 투자 계획이 이재명 정부 정책과 맞물린 국책 성격의 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이 향후 운용사 비즈니스에 '괘씸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왜 국내 행동주의는 늘 '하루짜리'로 끝나나
이 같은 딜레마는 과거에도 반복됐다. KB자산운용은 2018년부터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해 공개 주주서한을 잇달아 보내며 골프존의 계열사 거래 문제를 제기해 골프아카데미 사업 인수를 무산시키는 등 국내 행동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혔지만, 2019년 하반기 이후 공개 주주관여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업계 관계자는 "그룹 차원에서 공개 행동주의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계열사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퇴직연금, IB, 여수신 등 다양한 영업을 해야 하는 구조에서 운용사만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흥국운용 사례 역시 은행·증권·보험 등 금융그룹 계열 운용사가 대기업을 감시해야 할 주주이면서도 동시에 그 대기업과 거래해야 하는 금융회사라는 구조적 이중성을 다시 드러냈다는 평가다.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기관투자가의 적극적 수탁자 책임 행사를 주문하고 있지만,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장에서 "설득력 있는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서한조차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철회된 이번 사건은, 한국형 주주 행동주의가 넘어야 할 벽이 여전히 높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