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전남 해남 북평면 남창리의 낡은 정육점 간판과 텅 빈 고속도로, 그리고 CGI(Computer-Generated Imagery)로 재현된 외계 공간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 충돌한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는 실존하는 어촌 마을과 상상된 우주를 나란히 배치하며, 관객에게 '공간이 곧 서사'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실제 촬영지, 해남 남창마을
'호프'의 주 무대인 비무장지대 인근 가상의 포구 '호포항'은 실제로는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서 촬영됐다. 제작진은 2023년 10월부터 약 3개월간 이 마을에 머물며 황정민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과 함께 촬영을 진행했고, 골목과 상점을 1970~80년대 모습으로 손질해 시대적 질감을 입혔다. 정육점·식당·전당포 간판이 나란히 붙은 옛 버스터미널 건물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겨 영화적 배경이 됐다.
해남군 북평면 남창마을이 낙점된 이유에 대해 제작진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SF를 표방하는 이번 영화와 가장 흡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밝혔다.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르며 화제를 모으자 해남군은 남창리 일원을 영화와 연계한 1970~80년대 감성의 문화 거리로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했고, 기존 버스터미널 공간은 영화 속 '파출소' 콘셉트로 개조될 예정이다. 숲속 장면 역시 마을과 마찬가지로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일대에서 촬영됐으며, 특히 달마산 자락이 보이는 들판과 산기슭이 실제 배경으로 쓰였다.
영화의 약 70%가 해남에서 촬영됐다. 북평 남창거리와 화산면사무소 맞은편, 현산 월송, 송지 산정 등 4곳에 세트가 조성됐고, 여기에 고천암과 화산 어촌마을 등을 포함해 총 9개소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고속도로 추격 장면 역시 이들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어딘가에서 촬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지역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왕과 사는 남자' 강원도 영월처럼 영화 팬들의 방문 성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마을과 숲, 인간과 타자의 경계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공간 배치가 철저히 계획된 상징 체계라고 밝혔다. 그는 "숲은 그들(외계인)의 공간, 읍내는 인간의 공간"이라며 "읍내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숲속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고, 이야기의 끝은 그 숲에서 다시 마을로 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중심인물인 파출소장 범석(황정민)이 마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 성기(조인성)는 숲을 무대로 괴생명체와 맞선다는 이원적 구도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감독은 이 구조를 "핑퐁"이라 표현하며 "저들의 공간과 이들의 공간을 번갈아 보여주려고 했다. 진실을 향해 계속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가면서 인물들은 읍내에서 숲으로, 다시 숲에서 읍내로 향한다. 두 공간을 대비시켰다"고 밝혔다. 이는 문명과 자연, 질서와 미지의 대립을 지형학적으로 시각화한 연출 전략으로 읽힌다.
텅 빈 고속도로, 침묵의 미학
영화 속 고속도로 추격 장면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의 문법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일반적인 카체이싱은 도심속에서 다수의 차량이 충돌하며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지만, '호프'는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텅 빈 도로 위에서 추격전을 펼친다.
나홍진 감독은 이 선택의 근거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언급하며 "텅 빈 공간에서 소수가 뛰어다니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나. 우리 영화도 그런 느낌으로 실체를 찾아가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공간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는 '비어 있음'을 통해 인물의 고립감과 무력함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며, 채워진 공간이 아닌 결핍된 공간이 오히려 긴장을 증폭시킨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우주선 내부, 700억원이 빚어낸 미지의 공간
우주선 및 외계 존재의 CG 구현에는 영화 전체 제작비 약 700억원 중 상당 부분이 투입됐다. 이는 한국 영화 사상 최대 규모의 제작비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CG 비중이 여느 작품보다 높다. 나홍진 감독은 외계인 CG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죽을 만큼 힘들었다. 봉준호 감독님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이는 '옥자'와 '설국열차' 등에서 봉준호 감독이 겪었던 비주얼 이펙트의 고충에 공감을 표한 발언이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버추얼프로덕션 구현을 지원하며 3D 스캔 데이터를 제공, CG 제작의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칸 영화제 공개 이후 미국 매체 인디와이어는 "끔찍한 각본과 조악한 특수효과"라며 VFX 완성도를 문제 삼는 혹평을 내놓았고, 이에 나홍진 감독은 "국내 개봉 전까지 계속 손볼 것"이라며 CG 수정 작업을 이어갔다.
절망의 지형 위에 세운 희망
나홍진 감독은 제목을 '호프(HOPE)'로 정한 이유를 "희망과 희망이 충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절망을 제거함으로써 희망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는 지속적으로 무너진다"며, "극중 인물도 외계 존재도 모두 절망 속에서 사투를 벌이지만 물러서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시작점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불길함으로 채워져 있다"는 감독의 세계 인식이었으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불안이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장된 결과가 곧 '호프'의 공간 설계라 할 수 있다.

결국 남창마을의 낡은 골목, 텅 빈 고속도로, CG로 빚어진 우주선 내부는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세 개의 좌표이지만, 서사적으로는 인간과 타자, 질서와 미지, 절망과 희망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유기적 무대장치로 기능한다.
지역 소멸 위기의 어촌마을이 700억원 규모의 SF 블록버스터 배경으로 재탄생하고, 다시 관광 콘텐츠로 순환하는 과정 자체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희망'의 또 다른 실사판이라 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