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희선 기자] 2026년 6월 말 서유럽 전역을 강타한 40도 이상 폭염이 에어컨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럽을 글로벌 냉난방공조(HVAC) 업계의 신(新) 블루오션으로 급격히 전환시키고 있다. 이 틈새를 파고들기 위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가격 경쟁 대신 고효율·친환경·규제 대응형 혁신 기술을 앞세운 전략적 공세를 본격화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인프라 격차
기후 과학자들은 이번 유럽 폭염을 “인위적 기후변화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진단하며, 최소 12개국에서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갈아치운 것으로 분석했다. 유럽은 미국 가정의 약 90%가 에어컨을 보유한 것과 달리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이 평균 20% 수준에 그쳐 폭염이 그대로 건강·생산성 리스크로 전가되는 취약 구조를 드러냈다.
프랑스 환경에너지관리청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4%에 그치며, 독일은 3% 수준으로 더욱 낮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EU 내 에어컨 보급 대수가 2019년 약 1억 3,500만대에서 2050년 2억 7,500만대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해, 향후 수십 년간 구조적 수요 성장을 예고했다.
규제·문화가 만든 ‘고난도 시장’
유럽 다수 국가에서는 문화재 보호와 도시 미관을 이유로 역사적 건물 외벽에 실외기 설치를 제한하거나 금지해 왔다. 이 때문에 저가 분리형 에어컨보다는 창을 막지 않고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이동형·실외기 일체형·히트펌프 솔루션의 수요가 상대적으로 커지는 독특한 시장 구조가 형성됐다.
또한 EU는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냉난방 설비의 에너지효율 기준과 냉매 규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어, 단순 가격 경쟁형 제품보다는 고효율·저탄소 솔루션이 정책·보조금과 맞물려 빠르게 확산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 같은 규제·문화적 장벽은 중국산 저가 이동식 제품에는 부담이지만, 프리미엄 기술을 보유한 한국 업체에는 역으로 진입장벽이자 차별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삼성전자, 플뢱트 인수와 펠티에로 상·주거 투트랙
삼성전자는 상업용과 가정용을 동시에 겨냥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유럽 HVAC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우선 2025년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 플뢱트그룹(FläktGroup)을 약 15억 유로에 인수하며, 데이터센터·클린룸·대형 빌딩용 중앙공조 시장 지배력 확대에 나섰다.
가정용 시장에서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응용물리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냉매 압축기 없이 전기만으로 냉방을 구현하는 차세대 펠티에(Peltier) 냉각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 기술은 실외 응축기가 필요 없어 역사적 건물의 외벽 규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유럽 도시 미관과 규제 환경에 최적화된 ‘무실외기’ 공조 플랫폼으로 평가된다.
LG전자, 현지형 이동식·히트펌프로 ‘주거 공략’ 가속
LG전자는 창문을 가리지 않고 건물 외관을 해치지 않는 듀얼 배기 호스 방식 이동형 에어컨과 통합 히트펌프 시스템을 앞세워 유럽 주거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 친환경 주거단지 1,000세대 이상과 세르비아 일부 단지에 고효율 히트펌프를 공급하는 등, 유럽 주거단지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수주를 잇달아 확보하고 있다.
LG의 대표 주거용 히트펌프 ‘Therma V’ 시리즈는 공기열원 히트펌프(AWHP) 방식으로 외부 공기에서 얻은 열로 냉난방과 온수를 동시에 제공하며, 일부 모델에는 친환경 냉매와 AI 기반 ‘Multi V i’ 스마트 제어 시스템이 적용돼 에너지 비용 절감과 탄소배출 저감 효과를 강조한다. 유럽 최대 공조 전시회 MCE 2026와 ISH 2025에서 LG는 ‘혁신적 난방의 개척자’를 슬로건으로 유럽 특화 히트펌프 라인업을 전면에 내세워 다수의 어워드를 수상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정치·정책이 만든 수요 촉진 장치
정치권에서도 폭염 대응과 에너지 전환을 결합한 정책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HVAC 투자가 가속될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의 정당이 3,000만~4,000만 가구에 냉방 시스템 설치를 지원하기 위해 200억 유로 규모의 정부 보증 무이자 대출을 포함한 국가 ‘기후 계획(plan clim)’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녹색당 등 환경주의 정치 세력마저 “일정 수준의 냉방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기본 인프라”라는 취지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고효율·친환경 HVAC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과 재정 지원 명분이 강화되고 있다. 이는 히트펌프, 자연냉매, 고효율 제어기술을 앞세운 삼성·LG에게 정책 수혜 가능성을 키우는 직접적 촉매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에어컨 불모지’에서 도시 인프라로
과거 HVAC 시장의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유럽이 폭염·에너지 전환을 계기로 고효율 냉난방 인프라의 최대 성장지로 부상하면서, 한국 기업의 기술·포트폴리오 전략은 단순 가전 판매를 넘어 도시 인프라 재구축 프로젝트와 맞닿고 있다. 업계에서는 차세대 냉매 없는 공조 기술과 히트펌프 기반 통합 솔루션이 유럽 주거 문화를 바꾸는 동시에, 역사적 도시 미관을 지키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