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승원 기자] 팀 쿡 이후 15년 만에 바통을 이어받는 애플 차기 CEO 존 터너스가 “AI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위한 도구”라는 철학을 전면에 내세우며 실리콘밸리의 ‘AI=비즈니스 모델’ 흐름에 정면으로 선을 그었다.
2026년 9월 1일 공식 취임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AI를 “상상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열어줄 기술이지만, 기술이 사용자 경험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강조했다.
터너스는 내부 타운홀 미팅에서도 “AI가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할 것”이라면서도, 이를 애플 기기의 품질·개발 속도를 높이는 생산 인프라이자 사용자 경험을 정교하게 다듬는 도구로 규정했다. 이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자체 서비스화해 직접 과금·구독 수익을 노리는 구글·오픈AI 등의 전략과는 결이 다른 접근이다.
‘애플 인텔리전스’의 기대와 실망, 그리고 숫자
터너스의 철학은 애플의 첫 AI 플래그십 전략 ‘애플 인텔리전스’가 남긴 상처 위에서 나왔다. 2024년 iOS 18.1과 함께 등장한 애플 인텔리전스는 사진 앱 개선, 통화 녹음 요약, 시리 자연어 대화 등 온디바이스 AI 기능을 앞세웠지만, 초기에는 지원 언어가 사실상 미국 영어에 국한되고 약속한 기능의 상당수가 지연되면서 미완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론조사 수치도 엇갈렸다. 한 설문에 따르면 애플 인텔리전스 사용자 가운데 73%가 “새로운 AI 기능이 별로 가치가 없다거나, 그다지 그렇지 않다”고 평가했고, 경쟁 갤럭시 AI 사용자 87%도 비슷한 불만을 드러냈다.
반면 미국 아이폰 사용자 3,300명을 대상으로 한 모건스탠리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0% 이상이 애플 인텔리전스를 실제 사용해봤다고 답했고, 42%는 “다음 아이폰에 이 기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향후 12개월 내 기기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이용자 중 54%가 “AI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같은 조사에서 미국 소비자들은 AI 기능에 대해 월 평균 9.11달러까지 지불 의향이 있다고 답해, ‘기능 완성도는 부족하지만 가치 인식은 높다’는 양가적 현실을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애플 인텔리전스 1기(2024~2025년)는 기술적·기능적 완성도 측면에서 기대에 못 미쳤지만, 사용자의 지불 의사와 AI 의존도를 확인해준 일종의 리얼 월드 테스트이기도 했다.
시리 AI와 내부 ‘AI 플랫폼’…도구 중심 전략의 실체
전환점은 2026년 6월 WWDC였다. 팀 쿡의 마지막 키노트에서 애플은 구글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 설계한 파운데이션 모델을 바탕으로 음성 어시스턴트를 전면 재구축한 ‘시리 AI’를 공개했다. 새 시리는 연속 대화, 온스크린 인식, 다단계 작업 수행, 단독 앱 형태 등, 2년 전 이미 약속했으나 구현에 실패했던 기능들을 다시 내걸었다.
다만 애플은 이번에도 ‘느린 베타’를 택했다. 시리 AI는 우선 대기자 명단 기반의 개발자 베타로 공개됐고, IDC 등 시장조사업체들은 고급 기능 상당수가 올가을 첫 정식 버전이 아니라 iOS 27 후속 업데이트에 걸쳐 순차적으로 풀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는 기능 수를 앞세운 ‘쇼케이스 AI’가 아니라, 실제 기기·OS 생태계에 안정적으로 녹여 넣는 ‘도구형 AI’ 전략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철학은 이미 애플 내부 운영에도 적용되고 있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터너스는 올해 초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조직을 중심으로 새로운 AI 플랫폼을 도입해 설계·검증·테스트 전 과정에 AI 기반 자동화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이 플랫폼을 장기적으로 애플 전사로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여기서 AI는 사업 모델이 아니라, 제품 개발 속도와 품질을 끌어올리는 생산성 레이어에 가깝다.
무너진 디자인팀, 다시 ‘조니 아이브의 그림자’로
터너스의 ‘AI는 도구’ 철학은 디자인·엔지니어링 중심의 리더십 복원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블룸버그 마크 거먼의 ‘파워 온’에 따르면, 한때 조니 아이브 아래서 애플 제품 의사결정을 좌우하던 산업 디자인 그룹은 지난 10년간 존재감이 급격히 약화됐다. 2019년 아이브가 떠난 이후 디자인 조직 감독권은 당시 COO 제프 윌리엄스에게 넘어갔고, 2025년 말 윌리엄스가 은퇴하면서 쿡의 핵심 리더십 팀에서 디자인 출신 최고위 임원은 사실상 사라졌다.
터너스는 2025년 말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팀을 조용히 통합 지휘하며 전환을 준비해 왔고, 최근 사내 회의에서 “애플이 하는 일의 핵심은 여전히 디자인이며, 우리는 계속 디자인에 집중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또 별도의 내부 발언에서 “대부분의 고객이 소유한 것 중 가장 아름답게 디자인된 제품이 애플 제품일 것”이라며, 이 위상을 앞으로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공급망·서비스 수익에 무게를 둔 쿡 시대 후반부와 결을 달리하는, ‘디자인-하드웨어 재집권’ 선언이다.
한편 애플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존 터너스를 차기 CEO로 승인했으며, 팀 쿡은 이사회 의장(Executive Chairman)으로 이동하고, 반도체 조직을 이끌어온 조니 스루지가 최고 하드웨어 책임자로 올라서는 구조 개편도 병행된다. 하드웨어 엔지니어 출신 CEO, 칩 설계 총책의 승격, 그리고 디자인조직 위상 회복이라는 3각 편대가 앞으로의 애플을 규정할 키워드다.
‘아이폰 18–폴더블–에어팟 카메라–스마트 글래스’…터너스 앞에 놓인 숫자들
터너스가 공식 취임과 동시에 맞게 될 첫 시험 무대는 올가을로 예상되는 아이폰 18 시리즈다. 국내외 IT 전문매체와 증권사 리포트에 따르면, 애플은 폴더블 아이폰을 2027년 전후 출시하는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준비 중이며, 일본 미즈호 증권은 생산 지연을 이유로 폴더블 출시 시점을 2027년으로 보는 전망을 내놓았다.
또 다른 로드맵도 구체적으로 나왔다. 애플이 2027년 ‘카메라 탑재 에어팟’과 ‘20주년 아이폰’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외신과 애널리스트 리포트에서는 여기에 스마트 글래스 프로젝트까지 포함한 ‘포스트 스마트폰’ 하드웨어 포트폴리오를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쌓는 그림이 언급된다.
이 모든 제품군 위에 얹히는 공통 키워드는 온디바이스 AI다. 이는 AI를 별도 서비스로 판매하기보다, 하드웨어 차별화와 락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숨은 엔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터너스의 “AI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한때 ‘디자인 회사’로 불리던 애플이 다시 하드웨어와 디자인, 그리고 온디바이스 AI를 축으로 삼아 체질을 바꾸겠다는 선언문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