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드론 폭발음과 검은 연기가 뒤덮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상공 아래서,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은 ‘푸틴 패밀리 쇼케이스’이자 전시경제의 긴장을 드러내는 무대로 열렸다.
전통적으로 ‘러시아판 다보스’로 불리던 포럼은 이제 해외 투자자 대신 권력 핵심의 친인척과 우호 인플루언서가 채우는, 정치·경제·선전이 뒤엉킨 허영의 무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드론 공습이 가른 ‘푸틴의 고향 포럼’의 두 얼굴
포럼 개막을 전후해 우크라이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인근 군사·에너지 시설을 겨냥한 대규모 장거리 드론 공습을 감행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석유 터미널과 발트함대 핵심 기지인 크론슈타트 해군기지, 군수 관련 산업시설 등이 공격 대상으로 지목됐고, 일부 정유·저장 시설에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과 검은 연기가 치솟는 영상이 SNS와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엑스(X)에 연기가 치솟는 석유 저장시설 영상을 올리며 “러시아 영토 내 주요 시설들이 타격을 입었으며 그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석유 터미널이 포함됐다”고 밝혔고, 이를 “평화를 앞당기기 위한 장거리 제재 계획의 실행”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 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3개 구역에서 인프라 피해가 발생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고 발표했으며, 레닌그라드주 당국은 방공망이 드론 59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이 공격 여파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은 수 시간 폐쇄됐고 30편이 넘는 항공편이 지연·취소되면서 ‘러시아판 다보스’의 개막은 시작부터 혼란과 굴욕의 장면으로 기록됐다.
‘푸틴의 딸들’이 장악한 SPIEF의 무대
이 같은 안보 불안 속에서도 포럼 내부 무대는 놀라울 정도로 가족 중심 권력 구조를 과시하는 데 집중됐다. 독립 매체 메두자(Meduza)에 따르면 개막일에는 푸틴 대통령의 막내딸 카테리나 티호노바와 그의 6촌에 해당하는 엘레나 피센코가 나란히 연단에 올랐다. 이노프락티카(Innopraktika)를 이끄는 티호노바는 화상 연결을 통해 제약 포럼에 참여해 러시아 의약품 부문의 수입 대체 전략을 설명하면서, “국가 의약품 조달의 90% 이상이 여전히 서방산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며 “완전한 국내 자체 제약 혁신”을 최종 목표로 제시했다.
러시아 철도공사(RZD)의 의료 담당 이사인 피센코는 근로자 건강 세션에서 회사 의료 서비스가 출생률 제고와 직원 수명 연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소개하며, 국가 전략과 맞물린 인구·복지 담론을 가족 네트워크가 직접 전파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푸틴의 장녀 마리아 보론초바는 모스크바국립대 연구원 자격으로 ‘의학 분야의 진로 지도 및 멘토링’ 세션을 진행할 예정이며, 이는 두 딸 모두가 SPIEF에 3년 연속 공식 연사로 등장하는 기록이다.
블룸버그와 러시아·서방 언론은 이미 SPIEF가 BP·토탈과 같은 글로벌 에너지 기업 CEO들이 북적이던 시절을 뒤로하고, 고위 관료 친인척과 권력 서클 2·3세대가 존재감을 과시하는 플랫폼으로 변모했다고 지적해 왔다.
사라진 글로벌 자본, 부풀려진 ‘정치 행사’의 숫자
주최 측은 올해 SPIEF에 130개국에서 약 2만명의 참가자가 모였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참석자 구성을 들여다보면 ‘국제 경제 포럼’보다는 ‘친러 우호 인사 컨벤션’에 가까운 양상이 뚜렷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4년째 서방 기업들은 대부분 불참하고 있으며, 과거 수십억 달러 규모 에너지·인프라 계약이 쏟아지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올해 연사·참가자 명단에는 미국의 우파 논객 캔디스 오웬스와 논란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앤드루 테이트, 그리고 미국 미술위원회 위원장 로드니 밈스 쿡 주니어 같은 비(非)주류 정치·문화 인사가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러시아 관영·친정부 매체는 이들을 ‘미국 대표단’ 혹은 ‘서구 엘리트의 참여 증거’로 포장했지만, 주러시아 미국상공회의소(AmCham Russia) 회장 로버트 에이지는 “이 구성이 공식적인 미국 대표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공개 반박했다. 러시아 최대 은행 중 한 곳의 직원은 《모스크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올해 분위기를 “6년 만에 가장 숨 막히는 포럼”이라고 표현하며, 조직위원회가 드론 공격을 연상시킬 수 있는 ‘폭발적’, ‘폭탄’ 같은 단어 사용을 피하라는 지침까지 내렸다고 증언했다.
표면적인 숫자와 화려한 세트 뒤에서, 안보·경제·외교의 삼중 위기가 행사 언어와 공기마저 검열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쟁경제의 한계와 ‘가족 동원’의 정치학
블룸버그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 고위 관리들은 이미 푸틴 대통령에게 전쟁 지출이 “감당할 수 없는 궤도”에 올랐다고 경고한 상태다. 러시아는 2022년 이후 극초음속 미사일 치르콘 8기를 포함한 미사일 73기와 드론 656대를 동원하는 대규모 공습을 우크라이나에 퍼부은 뒤, 그 반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론 공습을 맞았다.
반세기 만의 가장 강도 높은 서방 제재, 고갈되는 숙련 인력, 에너지 수출 의존 구조 속에서 푸틴 정권은 “경기 침체는 없다”며 연 1%대 중반 성장률 수준을 ‘성공’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전시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우려가 누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SPIEF는 더 이상 투자 유치의 장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 퍼포먼스와 후견·친족 네트워크 결속의 도구로 기능하는 모습이다. 서방 제재 대응 기구와 수입 대체 위원회의 전면에 티호노바를 내세우고, 전략적 인구·의료·교육 의제를 딸과 친인척이 나눠 맡는 구조는, 러시아식 ‘정치 왕조화’가 이미 정책 집행 단계까지 내려와 있음을 시사한다.
드론이 상공을 뒤흔들고 서방 자본이 빠져나간 자리를, 푸틴의 가족과 충성 엘리트, 그리고 주변부 인플루언서가 채우는 지금의 SPIEF는 전시국가 러시아의 자화상이자, 향후 권력 승계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상징적 무대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