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유럽이 성병(STI, 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으로 ‘조용한 팬데믹’의 정점에 서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가 2026년 5월 21일(현지시간) 공개한 2024년 자료에 따르면, 임질·매독·선천성 매독이 모두 유럽 감시체계 도입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0년간 누적된 감염, 2024년 ‘역대 최고’ 폭발
ECDC가 발표한 최신 연간 역학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EU/EEA 28개국에서 보고된 임질 확진 사례는 10만6,331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5년 대비 303% 급증한 수치로, ECDC는 “2009년 유럽 성병 감시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라고 규정했다. 같은 기간 매독 역시 29개국에서 4만5,577건이 보고돼, 10여 년 사이 두 배 이상 늘며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클라미디아는 2024년 21만3,443건으로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흔한 성병 자리를 유지했으며, 성병성 림프육아종(LGV)도 3,490건이 보고됐다. ECDC 직접전파 및 백신예방 가능 질환 부서장 브루노 치안치오(Bruno Ciancio)는 “성병은 10년째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으며 2024년에 역대 최고 수준에 달했다”며 “이는 단기간의 일시적 급증이 아니라 구조적인 장기 추세”라고 평가했다.
‘보이지 않는 피해’…선천성 매독, 1년 새 거의 두 배
가장 충격적인 신호는 신생아에게서 나타났다. ECDC는 선천성 매독이 2023년에서 2024년 사이 “거의 두 배로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데이터를 제출한 14개국에서 선천성 매독이 2023년 78건에서 2024년 140건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치안치오 국장은 “선천성 매독은 산모의 감염이 태아·신생아에게 직접 전파되어 평생 지속될 수 있는 합병증을 유발하는 가장 비극적인 성병 형태”라고 우려를 표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유럽사무소도 선천성 매독을 “완전히 예방 가능하지만, 공중보건 시스템의 실패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표”로 지목한 바 있다. 이번 ECDC 수치는 단순한 숫자 증가를 넘어, 산전(antenatal) 관리와 취약계층 의료 접근성의 구조적 공백을 동시에 드러내는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큰 타격은 MSM, 이성애 여성·신생아로 확산
감염 양상은 집단별로 뚜렷하게 달랐다. ECDC는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성적 지향(게이·양성애·이성애 등)과 상관없이, 실제로 다른 남성과 성적 행위를 하는 남성을 뜻하는 공중보건·역학 용어)이 임질과 매독 모두에서 여전히 가장 불균형적으로 높은 피해를 입는 집단"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2014~2023년 사이 MSM 집단의 임질 신고율은 거의 30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2025년 12월 발표된 ECDC 정책 평가 보고서에서 나타난 바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 새롭게 부각된 지점은 이성애 집단, 그 중에서도 가임기 여성에서의 매독 증가다. ECDC는 “이성애자 집단에서는 가임기 여성 사이에서 매독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선천성 매독이 동반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BBC와 인디펜던트 등 주요 매체도 ECDC 자료를 인용해 “성적 행동 양식 변화, 콘돔 사용 감소, 코로나19 이후 밀린 검사·진단의 ‘보상 효과’가 맞물려 감염이 누적 폭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예방 체계의 구조적 허점…“13개국은 아직도 검사에 본인부담”
이번 기록적 증가세는 우연이 아니라, ECDC가 이미 2025년 11월 정책 모니터링 보고서에서 경고한 구조적 취약성이 현실화된 결과라는 평가다. 당시 ECDC는 EU/EEA 29개국을 대상으로 성병 대응 체계를 점검한 결과, 다수 국가가 노후화된 국가 전략과 불균등한 서비스 접근성으로 성병 급증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9개국 중 13개국은 여전히 기본적인 성병 검사에 대해 환자에게 본인 부담금을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위험군일수록 경제·사회적 취약성이 높은 현실을 감안할 때, 조기검사와 정기 스크리닝을 가로막는 가장 직접적인 장벽으로 꼽힌다. 또한 다수 국가에서 산전 정기검사에서의 매독 스크리닝 공백, 성 접촉자에 대한 추적검사 부족, 항생제 처방 지침의 불일치 등 “예방 기회 상실(missed opportunities)” 사례가 반복적으로 드지적됐다.
약으로 막을 것인가, 내성 키울 것인가…doxy-PEP의 딜레마
ECDC는 확산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2026년 1월 독시사이클린 노출 후 예방요법(doxycycline post-exposure prophylaxis·일명 ‘doxy‑PEP’)에 관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는 고위험군이 위험한 성접촉 이후 일정 시간 안에 독시사이클린을 복용해 매독·클라미디아 등 일부 세균성 성병 감염 가능성을 낮추는 전략으로, 미국·프랑스 등에서 이미 논쟁적 도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ECDC는 같은 지침에서 임질에 대해서는 doxy‑PEP의 광범위한 사용을 강하게 경계했다. 임질을 일으키는 임균(Neisseria gonorrhoeae)은 이미 세계보건기구가 “슈퍼박테리아”로 지목한 대표적 항생제 내성 균주로, 독시사이클린의 무분별한 예방적 사용이 내성 확산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결국 단기 감염 감소와 장기 항생제 내성 관리 사이에서 “공중보건 트릴레마”가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지금도 늦었다”…ECDC의 3대 과제, 한국에 주는 메시지
ECDC는 이번 발표에서 각국 공중보건 당국에 세 가지를 긴급 주문했다. 첫째, 국가 성병 전략을 최신 데이터에 맞게 전면 개편할 것, 둘째, 감시·보고 체계를 강화해 집단·지역별 유행 양상을 실시간에 가깝게 파악할 것, 셋째, 검사·치료 서비스 접근성을 확대해 비용·낙인·정보 부족이라는 3대 장벽을 낮출 것 등이 그것이다.
기관은 “결단력 있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현재의 추세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결과를 심화시키고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을 확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유럽의 사례는 성병을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저출산·인구구조·불평등과 맞물린 구조적 보건 위기로 봐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시킨다.
한국의 성문화 전문가는 "우리나라 역시 코로나19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성적 행동 변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만남 증가, 감염병 예산·정책의 우선순위 변화 등 유사한 변수를 안고 있다"면서 "유럽 데이터를 '먼 나라 통계'가 아닌 선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