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승원 기자] 전신마취로 환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해마(hippocampus)가 품사를 구별하고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등 고차원 언어 처리를 계속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의식과 인지의 관계를 둘러싼 통념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베일러의대 연구진은 뇌전증 수술 환자를 대상으로,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5월 6일자(현지시각)로 논문 ‘Plasticity and language in the anaesthetized human hippocampus’를 게재했다고 밝혔다.
해마, ‘깨어있지 않아도’ 소리와 단어를 배웠다
eurekalert, medicalxpress, ground에 따르면, 연구진은 먼저 뇌전증 수술을 받는 환자들을 전신마취(일반적으로 프로포폴·흡입마취제 병용)에 의해 임상적으로 완전 무의식 상태로 만든 뒤, 기존에 이 부위에 적용된 적이 거의 없던 초고해상도 전극 ‘뉴로픽셀스(Neuropixels) 탐침’을 해마에 삽입해 단일 신경세포 수준의 활동을 기록했다.
실험 1단계에서 연구진은 3명 안팎의 환자에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음색 사이에 간헐적으로 다른 성질의 ‘이상(oddball) 음’을 삽입해 들려줬고, 해마 신경세포들이 반복된 소리와 갑자기 등장한 이질적 소리를 구별해 반응 패턴을 달리하는 것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상 탐지’ 반응이 점점 예민해지는 학습 효과까지 관찰되면서, 연구진은 “전신마취 상태에서도 해마 신경망 수준에서 통계적 학습(statistical learning)이 이뤄질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어진 2단계 언어 실험에서 마취된 환자 4명에게 약 20분 분량의 짧은 스토리·단어 시퀀스를 들려주자, 해마는 신경 발화 패턴만으로 명사·동사·형용사·숫자·감정 표현 등을 구분해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특정 단어가 등장하기 직전, 그 단어의 의미·문장 내 위치와 관련된 예측 신호가 먼저 치솟는 ‘예측적 부호화(predictive coding)’가 포착됐다.
이는 우리가 깨어서 문장을 읽거나 들을 때, 다음에 나올 단어를 미리 짐작하며 문맥을 따라가는 뇌 반응과 유사한 패턴이다. 연구를 이끈 사미르 세스(Sameer Sheth) 베일러의대 신경외과 교수는 “환자가 완전히 마취돼 의식이 없는데도, 뇌는 여전히 주변 세계를 분석하며 의미 정보를 뽑아내고 있었다”고 밝혔다고 메디컬X프레스는 전한다.
의식은 ‘켜짐/꺼짐’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문제일 수도
이번 연구는 전신마취가 가져오는 ‘의식 소실’이 곧 뇌 정보 처리의 전면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정량적으로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크다. 한국·미국 공동연구진이 2010년대 이후 전신마취 환자 48명의 뇌파를 분석해, 전두엽에서 두정엽으로 향하는 정보 흐름이 차단될 때 의식이 사라진다는 공통 메커니즘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때도 두정엽에서 전두엽으로의 역방향 정보 흐름은 상당 부분 유지돼 뇌가 여전히 시각·청각 등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이번 베일러 연구는 이러한 선행연구 흐름 위에서, 특히 해마라는 ‘기억·언어 연관 핵심 부위’가 무의식 상태에서도 품사 구분, 의미 처리, 예측적 부호화까지 수행한다는 점을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셈이다.
연구진은 의식이란 특정 단일 구조(예: 해마, 시상 등)의 활동 여부보다는, 전두엽·두정엽·해마·시상·기저핵 등 여러 영역 간의 광범위한 상호작용 패턴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을 맞춰 작동하는 상태’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해마처럼 개별 부위는 무의식 상태에서도 나름대로 고난도 처리를 하지만, 이것이 전두엽 등 고차 인지 네트워크와 통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주관적 경험’으로 떠오르지 못한다는 해석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EEG 기반 마취 심도 정량화 연구들 역시, 마취 중에도 뇌파 리듬과 정보 흐름이 복잡하게 변조되며, 완전한 ‘침묵’이 아닌 질적으로 다른 상태임을 시사해 왔다.
AI 언어모델과 닮은 ‘무의식의 예측 뇌’
이번 결과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마취된 해마에서 관찰된 언어 처리 방식이 대형 언어모델(LLM)의 작동 원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구글 리서치와 신경과학자들이 수행한 독립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음성 언어를 처리할 때의 시간적·공간적 활성 패턴과,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AI 모델(예: 음성 인식·LLM 기반 모델)의 중간 계층 활성 패턴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정렬(alignment)’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베일러 연구팀이 관찰한 예측적 부호화 역시, LLM이 앞선 단어 시퀀스를 기반으로 다음에 나올 토큰(token)의 확률 분포를 계산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처럼 인간 해마의 무의식적 언어 예측 메커니즘이 LLM과 닮아있다는 사실은, 양자의 ‘정보 처리 전략’이 수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나의 예로, 전신마취 중에도 해마가 다음 단어를 통계적으로 예측하고 문맥적 의미를 분류한다면, 향후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와 연결된 언어 보조 기기 개발 시, LLM이 환자의 해마·언어 관련 부위 신호 패턴과 직접 매칭되도록 설계해 언어 복원 정확도를 끌어올리는 방향의 기술 발전이 가능해진다.
연구진 역시 “의사소통 능력을 잃은 환자를 위한 음성·문자 생성 보조 기기나, 두뇌-기계 인터페이스 설계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의료·윤리·법적 함의… “마취 중 ‘무엇을 듣게 할 것인가’”
이번 연구는 임상과 윤리·법 영역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 우선 의료 현장에서는 전신마취 상태에서도 뇌가 단순 감각 신호를 넘어 언어의 의미와 문맥을 일정 수준 처리한다는 점이 반복 입증된다면, 수술 중 환자에게 들려주는 의료진의 대화·환경 소리 구성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논의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미시간의대 공동연구팀은 전신마취 상태에서도 두정엽→전두엽 방향의 정보 흐름이 유지돼, 외부 시각·청각 정보가 뇌 안에서 연속적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 해마의 품사 구분·의미 처리·예측 기능이 더해진다면, 수술실에서 오가는 언어정보가 환자의 무의식에 어떤 정서·기억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후속 연구와 가이드라인이 요구된다.
아울러 전신마취가 소아·고령층의 신경독성과 인지기능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이 축적되는 상황에서, “마취 중에도 뇌는 학습한다”는 이번 결과는 그 방향을 조금 비튼다. 지금까지는 반복 마취가 미토콘드리아 기능 저하, 뇌세포사멸 증가 등을 통해 학습·기억력 저하·정서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부정적 신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면 베일러 연구는 적어도 해마 수준에서 마취 중에도 통계적 학습과 예측적 부호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어떤 자극을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마취 중 뇌 활동을 ‘해로운 침묵’이 아니라 ‘조용한 학습’으로 전환할 여지가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다만 연구진 역시 특정 약제 조합·지속 시간·해마라는 단일 영역에 한정된 결과이며, 자연수면·혼수·식물인간 상태에 그대로 일반화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선을 그었다.
“의식은 얼음산 위, 뇌는 수면 아래서 계속 일한다”
이번 네이처 논문은 전신마취 상태에서도 인간 해마가 소리의 변화와 말의 의미 정보를 처리하고, 시간이 지나며 그 패턴을 ‘학습’·‘예측’한다는 점을 단일세포 수준에서 포착함으로써, “의식은 꺼졌지만 뇌는 멈추지 않는다”는 과학적 증거를 한 층 보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스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정신이 없다’고 여기는 상태에서 뇌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다시 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억 건의 전신마취 수술이 이뤄지고, 한국에서도 연간 수십만 건 규모의 전신마취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마취 중 뇌’에 대한 이해는 이제 환자 안전·사후 인지기능 관리·뇌-기계 인터페이스 개발·AI-인간 뇌 비교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의식이라는 얼음산 위로 드러난 부분만을 보던 시선이,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작동하던 언어·감각·예측 메커니즘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























































